최정철 인하대 교수

인천항의 최초 개항지는 연수구 옥련동 일대  한나루다. 한성백제 372년 개항하여  1883년 제물포의 강제 개항으로 기능을 상실한 한나루 앞 바다에 2015년 인천 신항이 들어섰다.인천항은 지난 20여년간 인천내항 및 연안부두를 벗어나 인천남항, 인천북항, 경인항, 인천신항, 왕산마리나 등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인천항은 2025년 세계 총물동량 20위이내, 컨테이너물동량 30위이내 진입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최정철 인하대교수의 '인천항의 개항과  근대강제개항', '인천항의 비전과 전략적 과제'칼럼을  두차례 나눠 싣는다.

 

▲ 최정철 인하대 교수 사진=인천뉴스 DB

인천항은 한성백제(B.C 18~475, 493년간 존속) 수도 위례성(경기도 하남시)의 관문인 한나루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능허대는 여객터미널 명칭)로 개항을 했다. 즉, 한성백제 근초고왕 372년에 한나루에 고대개항을 한 것이다. 한나루를 중심으로 한 고대 인천항은 중국 산둥성 펑라이(옌타이), 중국 남부, 일본 등과의 교류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인천항의 개항원년은 372년이며, 부산항도 근대강제개항인 1876년이 개항원년이 아니라 조선 태종이 일본 대마도와 무역을 위해 부산포를 개방한 1407년이 개항원년인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통일신라(676~892) 시대는 수도 금성(경상북도 경주시)의 관문인 한주 당항성(경기도 화성시 남양)이 중국 산둥성 덩저우(옌타이)를 거쳐서 당나라에 이르는 해상로의 중심역할을 했으나, 지리적으로 한나루 능허대도 한주(경인지역)의 관문으로서 항만의 역할을 했다.

고려(918~1392) 시대는 수도 개경(황해남도 개성시)의 관문 예성항(벽난도)이 국제항이었으며, 남송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고려 개경 여정도(1123년)를 보면,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 출발하여, 흑산도, 안면도, 대부도, 영종도, 석모도를 거쳐서 예성항에 입항하고 있다. 이러한 여정이 나타나는 것은 석모수로를 이용하여 예성항에 입항하기 위해서는 밀물을 이용하여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의 수로를 통과하여 청주초를 휘돌아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영종도와 대부도의 중간에 있는 한나루 능허대도 문학산의 북쪽에 중심지를 두고 있는 인주(인천)의 관문으로서 항만의 역할을 했다.

조선(1392~1910) 시대는 수도 한양의 마포나루가 관문역할을 하였으며, 강화도 월곶돈대 연미정이 중간기착지 역할을 했다. 연미정이 발달한 것은 염하수로를 이용하여 한강입구에 도착한 선박들이 밀물을 이용하여 한강을 거슬러 마포나루에 입항하기 위해서 잠시 머물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포나루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해방후까지도 항만으로 기능을 하였으며, 마포나루와 연미정에 이르는 염하수로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한나루도 문학산의 북쪽에 청사 및 중심지를 두고 있는 인천도호부(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의 관문으로서 제물포가 근대강제개항되기 전까지는 항만의 역할을 했다.

구한말 1883년에 제물포가 일본에 의하여 근대강제개항지로 선정된 것은, 대형 기선은 염하수로를 통과하여 마포나루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한적한 시골포구인 제물포에 대형기선을 접안하면 수도 한양과 가장 가까운 육상거리이며, 조선인 거주지인 문학산 북쪽의 인천도호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일본인 거주지를 조성하기 쉽고, 제물포 배후지역에 취락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도시계획을 수립하여 일본인 거주용 신시가지를 조성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됐다.

제물포에 강제개항된 인천항은 일제하에서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대형선박을 접안시키기 위하여 제1갑거 공사(1911년6월~1918년10월)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 갑문 폭을 18m로 건설하여 4,500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었다. 갑문 폭을 22m로 건설하여 8,000톤급 선박을 접안시키려고 계획한 제2선거 공사는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추진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해방이후 박정희정부는 제물포, 월미도, 소월미도를 잇는 해역 전체를 갑문화하여 인천내항을 개발하는 공사(1966년6월~1974년5월)를 추진했으며, 갑문 폭을 36m로 건설하여, 조수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파나마운하를 운항할 수 있는 파나막스급 5만톤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했다.

. 인천내항은 8개부두 48선석으로 순차적으로 개발되었으며, 인천내항 4부두는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부두로 개장되었고, 5부두는 자동차전용부두로 개장되었으며, 7부두는 곡물 및 사료 전용부두로 개장되었다. 인천내항을 추진하면서 인천역 앞에 있었던 연안부두는 1966년에 현재의 연안부두로 이동했다.

1980년대 이후 인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물동량 증대 및 선박이 5만톤급 이상으로 대형화하는 것에 대비하기 위하여 인천내항을 벗어나 인천외항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노력을 기울였다.

김대중정부하에서 국제금융위기를 극복하고자 적극적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하였고, 그 결과 2001년에 인천남항에 싱가포르항만공사(PSA)가 투자한 인천컨테이너터미널이 착공되었으며 2004년에 컨테이너터미널 400m가 부분 개장됨으로써 인천항은 외항시대를 개막하였고, 2005년에는 선광컨테이너터미널 407m가 개장되었다. 남항은 PSA의 인천컨테이너터미널이 2006년에 600m로 확장했으며, 2009년에 E1컨테이너터미널 259m가 추가 개장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컨테이너물동량이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2003년에는 한중간에 카페리노선이 독점하던 해운시장을 컨테이너전용선박이 운항할 수 있도록 개방함으로써 화주의 물류비도 낮추고 남항에 신규로 개장한 컨테이너터미널에 컨테이너물동량을 확보해 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2002년에는 인천북항 설계비가 국회 예결위에서 반영되어 인천북항 개발이 착수되었으며, 2007년에 철재부두가 개장되었고, 2008년에는 목재부두가 개장되면서 순차적으로 총 17선석을 확보하여 인천내항에서 상당한 벌크화물을 인천북항으로 이전하여 인천내항 1,8부구를 개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

노무현정부하에서 2007년에 송도국제도시 앞에 컨테이너선박의 초대형화에 대비하여 대수심을 확보하는 인천신항건설계획이 공시되었다. 인천신항 1단계는 2009년에 착공되어 2015년에 선광컨테이너터미널 420m가 우선 개장되었으며, 2017년에는 선광컨테이너터미널 800m가 완전 개장되었고, 한진컨테이너터미널 800m가 2017년 10월에 완전 개장을 앞두고 있다. 인천항의 컨테이너처리량은 1976년 33,000TEU(twenty equipment unit)에서 2016년 2,679,504TEU로 40여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으며, 2017년은 300만 TEU를 넘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즉, 인천항은 컨테이너터미널시설 확보가 컨테이너물동량 증가를 견인하여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명박정부하에서 2012년 인천남항에 국제여객터미널 1단계 건설공사 실시계획이 승인되어, 2012년에 착공되었으며, 2019년 4월 개장을 앞두고 있다.

한편, 박근혜정부하에서 300여척의 요트가 접안할 수 있는 왕산마리나가 추진되어, 2014년에 임시로 개장하여 인천아시안게임을 치루었으며, 2017년에 완전 개장되었다.

인천항은 지난 20여년간 인천내항 및 연안부두를 벗어나 인천남항, 인천북항, 경인항, 인천신항, 왕산마리나, 인천남항국제여객터미널로 지속적으로 확대했다.

 인천항의 최초 개항지인 한나루가 1883년에 한적한 시골포구인 제물포의 근대강제개항으로 기능을 상실했으나, 132년만인 2015년에 한나루 앞에서 인천항의 주력항인 인천신항이 개장되고, 인천남항국제여객터미널이 2019년 4월에 개장됨으로써 인천항 1,8부두는 부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친수공간으로 개방을 하게 된다. 결국, 인위적인 근대강제개항의 역사가 자연적인 개항의 역사로 회귀하는 원시반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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