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호의 짧은 이야기 묶음 '공수' 1부가 막을 내렸습니다. 오늘은 등단 초기에 발표했던 단편소설을 올리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큰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신 구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 전하며 엎드려 절합니다. 이후 이야기는 차후 소설집을 통해 뵙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미호 배상"초대우리는 곧 만날 것이다. 준비가 끝났다. 방금 아로마 향 오일 촛대에 불을 붙였다. 남자에게 보낸 초대장에 적은 시각은 오후 8시였다. 거실 끝자락 적당한 높이에 맵시 있게 걸린 양면 시
36. 유리구두와 오페라의 유령“인간의 경험은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외부의 자극에 따른 것이라도 경험의 근원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고통, 비참함이라는 마음 상태는 자신을 관리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또는 자기사용설명서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미숙함에서 오는 것입니다.”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딱 3가지만 말해달라고 찾아온 당집이었다. 이 무당마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합당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더 살아야 할 이유 없음 또
35. 거래의 종말“인간사 모든 관계는 거래잖소. 부부관계라 해서 아닐 거 같은가. 천만에. 비열하리만큼 냉혹한 거래가 바로 부부관계야. 거래의 속성을 잘 아는 사람들은 사랑이나 이념 따위로 관계 자체를 뭉개면서 손해날 짓을 안 해. 암, 절대로 안 하고말고. 내가 왜 ‘따위’라는 표현까지 썼냐 하면, 제일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그런 ‘타령’을 해대는 작자들이거든. 관계의 본질을 모르니 사랑으로 일어난 자신의 거룩한 감성까지 타락시켜버리는 게지.”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면 모두가
34. 파도가 부서질 때 창가에서“생사(生死)는 파도와 같습니다. 일어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또다시 일어나 달려드는 파도 말입니다. 소중한 가족이나 평생을 일궈놓은 큰 재물이 있다고 해도 생사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보살님, 안타깝지만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답니다.”어려서부터 아픈 손가락이었던 막내딸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돈을 내놓으라고 성화이다. 말기 암 투병을 하느라 정신과 육체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는 어미를 붙잡고
33. 흐르는 강물처럼“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제는 그만 손 털고 떠나야 할 때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많이 늦었답니다. 더 미뤄봐야 본인만 손해이니, 어서 털고 일어나 박차고 나오시랍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내기주님만을 기다리고 계신 귀인이 계시건만, 어찌하여 엄한 것에 홀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단 말입니까.”3개월 전에 입사한 신입직원 때문에 골머리가 아파죽겠는데, 이 무당 뭔 ‘멍멍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가뜩이나 부글부글 끓어올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심보가 말릴
32. 앞머리를 자른 여자“외롭다고 하소연만 할 줄 알았지 사람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심성이 없는데, 사랑을 바라시다니요. 심지어 남자와의 사랑이라뇨. (고개를 가로저으며) 타고난 직성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혀를 차며) 지금처럼 혼자 먹고 혼자 자고 하셔도 한 세상 잘만 갑니다. 무엇하게 허구한 날 남자 타령이랍니까.”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다.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쳐 하루하루가 시려 죽을 판인데, 이 염병할 무당 서슬을 시퍼렇게 갈
31. 오해할 결심“산 사람이 죽은 사람 하나를 이기지 못하니, 타고난 본인 ‘업보’라 해도 과한 부분은 있구먼. 힘센 무당 서넛이 붙어도 쉽지 않겠네, 그려. 저리 단단히 얽힌 심줄을 어찌하면 끊어낼꼬.”최근 이상행동이 반복되고 있는 동거인 형우를 보자마자 터진 무당의 공수다. 형우는 두어 달 전부터 시작된 이상증세로 일상생활 전부가 마비된 상황이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밤낮없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고 심할 때는 눈이 뒤집혀져서 괴성을 질러대곤 했다. 그러한 행동을
30.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대주님 사주에 삼신이 보이지 않는데, 대주님 아내분 배 속에는 아기가 보입니다. 알고 계신 겁니까, 아니면 저한테 확인을 받고 싶어 오신 겝니까?”자리에 앉기도 전에 터진 무당의 공수가 목을 벤다. 싹둑! 소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예리하고 빠른 솜씨다. 최근 외출이 잦아지고 귀가 시간이 늦어진 아내의 몸에서는 매번 (‘아내의 바람’이라는 심증에 쐐기를 박는) 익숙하지 않은 샴푸 냄새가 났다. 두어 달 가까이 그 냄새를 애써 무시했다. 내가 지나
29. 아델라인에게 바치는 세레나데“네가 데리고 살 사람도 아닌데, 무엇하게 네 잣대를 들이대서 기다, 아니다 소란을 떤단 말인가. 본인 본분이나 잘 지키고 사셔. 이럴 시간 있으면 네 남편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시부모 봉양에 마음 한 자락 더 보태란 말이다. 복덕이 다른 데서 오는 게 아니거늘.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소갈딱지 하고는. (쯧쯧!)”올해 28살 된 막내 도련님 결혼식을 앞두고 밝혀진 경악을 금치 못할 손아래 동서가 될 사람의 나이는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27. 설거지 당한 남자의 최후“내가 탄 자동차가 이미 터널 속으로 진입했는데 나아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멈출 수도, 차를 돌려나올 수도 없습니다. 일단은 그대로 밀고 나가야지요. 밝은 빛 동그라미가 보일 겁니다. 결정은 동그라미 밖으로 나와서 해도 늦지 않습니다. 일단은 터널을 나와야 선명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나는 요즘 말로 설거지를 당한 남자이다. 아내라는 사람에게서 설거지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밥알이 목구멍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26. 착한 여자 부수기“어느 안전이라고 효녀 노릇이냐, 못된 것!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해진 노인 하나 모신답시고 유세를 떠는 것이냐. 어림없다. 그따위 얄팍한 속임수로 눈물 콧물 쥐어짜 보았자 여기서는 안 통한다. 간악한 것 같으니.”항암 치료 중인 모친의 섬망 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하루하루의 삶이 지옥으로 치달은 것은 3개월 전부터이다. 물론 그 이전이 천국이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내 인생 어느 한 단락도 천국이었던 적은 없었으니까. 다만 이번만큼은 해도 해도
25. '보름달을 가진 할머니'“지렁이 사체로 뒤덮인 땅이 매매 고사 지낸다고 팔리겠습니까. 우리 할머니 말씀이 ‘심보가 참으로 고약하구나.’ 그러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온 귀인인데, 그것도 모르고 다리를 물어뜯고 살을 발기고 있답니다. (짧은 한숨) 지금 시급한 것은 땅이 팔리고 말고가 아니라, 대노하신 가중(家中) 조상 신명님들의 심기를 푸는 일입니다.”내놓은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땅을 보러오는 사람이 없는데다가, 어쩌다 인연이 닿아도 계약서 쓰기 직전에 파투가
24. 죽지 않는 공무원“혼 사냥에 나선 귀신들이 냄새를 맡고 줄줄이 따라붙었어. (쯧쯧, 혀를 차며) 처자 수호령 모습이 처참하기 짝이 없구나. 온통 너덜너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신 겐가. 수호령 말씀이 막바지 힘을 다해 간신히 예까지 모셔왔다, 하시네. 저 귀신들에게 잡아먹히면 처자 영이 저들에게 묶여버리니, 제발 좀 도와달라고 눈물을 뚝뚝 흘리시네. 하이고, 이를 어쩌나.”숱 없는 짧은 백발에 파마가 풀려 부스스해진 머리모양새를 한 무당이 자리를 잡고 앉기도 전에
23. 모란꽃과 할머니“원수 같은 젖탱이. 차라리 나오지나 말지. 찔끔거리는 젖탱이 쥐어짜 가며 친정 부모는 물론이고 결혼해서는 남편에 자식, 시집 떨거지들까지. 에효~ (긴 한숨) 손에 물마를 새 없이 평생을 쪽잠 자며 거둬 먹였으니. 인생사 아무리 덧없고 헛되다지만. 아이고, 살아온 세월 굽이굽이가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하다.”최근 3개월 사이 음주운전 사고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의 미심쩍은 행동 등 석연찮은 일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멘탈 붕괴 일보 직전이다. 옆에서 상황
22. 개구리 알까기 게임 최종 승자는“올해 넘기기가 힘들답니다. 우리 ‘벼락대신’ 할머니 말씀이 미련퉁이 내 기주야, 고생은 많았다만 승패는 가는 날 돼봐야 알 것이다. 하십니다. 이 댁 대주님 성미가 더러워서 그렇지, 대단하신 분은 맞다고 하십니다. 마지막까지 정신 줄 놓지 않고 그 단단하게 박힌 아상 또한 끝끝내 깨뜨렸다고 하시네요. 참 장하다, 장해. 하십니다.”8년째, ‘원수’ 같은 남편 똥 기저귀를 갈아가며 해온 병 수발이 올해로 끝난다는 말은 환호성을 질러도 시원
21. 사탕의 참맛을 아십니까?“총체적 난국이로구먼. 안팎으로 업이 중중하니, 이를 어쩔꼬. 기운을 타고 집으로 들어온 원귀가 관세음보살 형상으로 몸집을 키우고 있으니 조만간 뭔 사달이 나도 크게 날 판국이야. 내 기주님아, 어디 가서 뭐를 들여놓은 게냐, 고 물으신다.”올해 들어 연달아 세 번의 교통사고가 일어난 남편(현직 화물차 기사)은 물론이고 아들(고등학교 2학년)은 한 달 전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종아리뼈가 부러졌다. 뇌진탕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
20. 다시 거인(巨人)!“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못 해보고 가는 인생이 태반입니다. 신념의 문제겠지요. 결국 이런저런 변명으로 자신을 묶어놓고 제자리 뛰기만 죽어라, 하는 게지요. 그런 사람들 특징이 또 뭔 줄 아십니까. 입에 달고 사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죽도록 열심히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나아지는 게 없느냐’는 볼멘소리 말입니다. 남 탓이나 안 하면 그나마 다행인 거고요.”20대 청춘을 화류계에서 태워 보냈고,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나.’ 싶은 마음에 불현듯
19. 고장난 방아쇠로 당기다.“삶의 질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지. 자네처럼. 그런데 삶의 질이라는 것은, 생각처럼 만만하지가 않거든. 세상과 한판 맞장 떠본 사람이거나, 단 한 번이라도 세상을 넘어뜨려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 아니겠나. 돈이나 지식, 건강. 뭐 이런 거로 될 것 같으면야 나와 같은 사람 부러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할 일이 있겠나.”나의 감정 전부를 지배한 여신이 2주일 전에 나를 떠나갔다. 재회할 수 있느냐, 를 묻는 나의 질문에는 답이 없
18. 이브자리가 없는 남자“반평생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라고 해도 서로의 마음을 묶고 살지는 않습니다. 생존과 생활에 대한 이해타산 때문이지요. 우리 할머니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고 내주랍니다. 곳간 열쇠도 손에 쥐어주고 금덩이도 얹어줘야 눌러 앉힐 수 있답니다. 마음을 묶지는 못해도 금덩이로 몸을 붙잡아 매놓을 수는 있답니다.”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마음에 쏙 드는 여자를 만났다. 10개월 전이었다. 그 여자는 고아로 자라나 20대에는 이
17. 눈빛살인 감옥 탈출기“남들이 좋다는 기준에 취해서 자신의 행복을 잃고 산다는 것은 슬퍼. 그런데도 참 이상하지? 슬픈 그 방에 갇혀 살면서도 자각을 못 하거든. 심지어 그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는 열쇠를 쥐어줘도 벗어나지를 못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방 문고리를 끝끝내 놓지를 못해. (울컥, 하며) 잘했네, 잘했어. 이제부터가 시작일세.”한때는 남들이 들어가기 어렵다는 공기업에 입사해 승승가도를 달렸다. 또 능력 있는 의사 남편을 만나 예쁜 딸을 키워가며 행복한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