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파운틴과 나는 약속했다. 조 마운틴이 먼저 두 포로 감시원에게 접근해 영어교습을 해 주겠다고 하고 곧이어 나도 합류하기로 했다. 우리 계획은 잘 풀렸다. 두 포로감시원은 우리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경계울타리가 있었다. 무어 중위와 보스웰 병장이 내려갈 곳에서 약 68m 떨어져 있었고, 두 사람은 더 아래로 약 230m 떨어진 계획된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두 포로감시원은 영어교습에 즐거워했고, 완전히 긴장을 풀었다. 우리는 왜 스코틀랜드 사람이 영어로 말하는 지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밀러(영국군 로열 포병대 122육군 야전 연대)탈출은 내 마음과 결코 먼 것은 아니었다. 나는 되도록 빨리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철도공사장에서 노역을 하는 동안 영어를 제법 구사할 수 있는 조선인 노동자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영어를 스코틀랜드 선교사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그는 반일의식이 강하다고 나에게 분명하게 밝혔고, 일본이 조선을 악랄하게 탄압했던 1919년을 말했다. 일본군은 죄 없는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학살을 자행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이후에도 계속 탄압을 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그
인천 포로수용소 포로 군의관 슈워츠대령은 1946년 4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군 CIC H. James 대위와의 인터뷰에서 막사로부터 50피트정도 떨어진 변소에 대한 언급을 했다. 4개의 대형 변소가 있었으며, 각 변소마다 12개의 칸막이가 처져 있어, 포로 12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각 칸막이 마다 바닥에는 나무 널빤지가 놓여 있었고, 널빤지 가운데는 가로는 길고, 세로가 짧은 직사각형 구멍이 나 있었다. 정화조는 전체가 하나이었기 때문에 구멍에서 올라오는 분뇨 냄새로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특히 여
연합군 포로수용소 인천분소는 1942년 9월 25일 개소했다. 조선군 사령부의 갑작스런 결정으로 아직 포로수용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 건축한 러시아식 연와조 5동, 5인용 세면장, 수도까지 설비한 일본육군 표준형 창사(廠舍: 공장 건물)를 임시 포로수용소로 마련했다. 위치는 인천항 경인산업도로부터 약 5M정도 떨어진 해안 건강지라고 했다.(https://dl.ndl.go.jp/info:ndljp/pid/10280957 참조)원래 인천피복공장으로 태평양 전쟁 이후 삼국동맹 체제가 무너지고, 이로 인해 원료 수입 등이
영국군 포로 제임스 밀러는 1942년 12월 15일 일본군의 싱가포르 공격에 함락되면서 포로가 된 영국군 왕립포병대 소속 병사였다. 그가 45년 만에 영국 에딘버러에서 영국군 포로전우회 모임에서 인천 연합군 포로수용소 전우를 만나고 인천 연합군 포로수용소 생활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 회고록을 썼다.밀러는 그의 회고록에서 싱가포르에서 출발한 후키마루호를 타고 대만을 거쳐 인천 체산항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연합군 포로들은 부산을 내려 부산임시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서 내려서 경성포로수용소에 수용되는
1942년 2월 15일 일본군은 싱가포르 함락으로 태평양전쟁의 정점을 찍으면서 일본 제국주의 의 위력을 크게 과시했다. 싱가포르의 함락으로 10만 여명의 영연방 연합군 포로가 생겼다. 필리핀 점령, 인도네시아 점령 등으로 포로가 급증되어 있어 연합군 포로가 20만여 명이 넘게 되었다. 일본육군은 포로 수용을 전선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후방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는 통례를 따를 수가 없었다.싱가포르 함락으로 생포한 영국군 1만 3천명과 호주군 1만 5천명의 포로를 현지 요새를 포로수용소로 바꿔 수용했다.
마루유 승조훈련병은 대부분 일본 육군 전차병이었다. 그리고 함정장 등 승조장교는 고등공업학교 출신 기술장교였다. 그래서 이들은 선박에 관한 지식이나 조정할 수 있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일본 해군과는 앙숙관계였기 때문에 전혀 군함에 관련한 교육지원을 요청하지 않아 일본 육군 자체에서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그래서 일본 육군은 마루유 육군수송교육대를 에히매현 이요미시아시에 신설했다. 일본 해군의 잠수함 승무원 양성기간이 5년인데 비해 일본육군 잠수정 승무원 양성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기초교육만 수료하고 시급한 물자보급을
1944년 8월 마루유 3001호는 시험 항행을 완료하고 일본 에히매현 이요미시마시에 육군 마루유 수송교육대로 출발하였다. 야간에만 부상하라는 명령에 따라 군산 앞바다에서 부상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는 일본우선의 석탄운송선이 미확인 잠수정을 발견한 것이다. 선장은 일본 해군 전투함 등록 목록을 찾아봐도 없는 잠수정이었다. 일본 해군 당국에 무선통신으로 문의를 해봤으나 전혀 모른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선장은 마루유 3001호를 적 잠수정으로 판단하고 충돌 공격을 가했다. 충돌 공격을 받은 마루유 3001호는 함체 내부의 균열이라는
일본육군수송사령부 소속 아카즈키(曉)부대 인천파견대가 시운전에 직접 관여했다는 기록은 고 김재근(서울대 조선공학과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교수의 수상집 『등잔불』(정우사,1985), 우암문집『내가 걸어온 길』에 간략하게 나온다. 1944년 여름 마루유(○ゆ) 3003~4호 시운전할 때 직접 승선했던 아카즈키 부대원에 관한 기억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아쉬운 것은 관련 자료가 없는 관계로 기억에 의존해서 기록했다는 점이다.“그것은 본시 일본 육군의 수송부대인 아카즈키부대가 발주한 것이어서 수(輸)자의 일본어 음인 유자에 동그라미를 붙
1944년 2월 일본 시코쿠 에이메현 이요미시마시의 마루유 육군수송교육대(아하 아카즈키부대)에서 기초 잠항기술 교육을 마친 아카즈키부대 소속 군인들이 인천으로 왔다. 일본 해군의 잠항 교육은 5년이라는 장기간을 거쳐 실시했지만 아카즈키부대 군인들은 1년 미만의 기초 잠항만 하고 실전에 배치했다. 이와 같이 아카즈키부대 군인들이 짧은 기간 내에 잠항 교육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시급한 물자수송을 위해 건조 진행 중인 마루유 잠수정에서 최종훈련을 하는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마루유 잠수정에 승선하는 아카즈키부대 군인들은 대부분 공업고등학교
동양방적 인천공장 조선인 여성직공 노동자들은 2교대 12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일당 20전을 받았다. 한 끼 식사만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저임금으로 인해 도중에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공장 측은 당시 인천지역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현재 1000여명의 남녀직공을 수용하고 대대적으로 조업 중이라는 데 그 여직공의 임금에 있어 매일 12시간의 노동으로 겨우 20전을 점심값이라고 지급한다는 바 취직하였든 소녀들 중에 중간에 그만 둔 소녀도 많다고 하여 지식인들 중에서는 비난성이 자자하다고 하였다.’(동아일보 1934.7
동양방적 인천공장 여성 직공 노동자의 일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장 내 기숙사가 있기 전에는 주간 작업조와 야간 작업조 2교대 출퇴근제였다. 주간 작업조는 새벽 6시까지 도시락을 들고 공장으로 출근해야 했다. 그리고 12시간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고, 그 대가로 일당 20전을 받았다. 야간 작업조는 오후 6시에 작업에 투입되어 오전 6시까지 밤샘 노동을 했다. 주야간 작업조는 1주일 단위로 교대되어 휴일도 없이 365일 24시간 공장 가동되었다.여성 직공 노동자의 연령은 16, 17세가 주류를 차지했다. 일부 20세 전후 고참
1935년 3월 동양방적 인천공장에서 남녀직공 모집공고를 했는데, 이전 해 7월 구인난과는 달리 만석정 일대가 혼잡할 정도로 입사지원자가 몰렸다. 춘궁기에 들어서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민층 여성들과 부모와 남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부녀자들이 인천으로 가출해 무조건 입사 지원을 하면서 발생한 사태였다. 이에 공장 측은 참혹한 생활에 처해 있는 부녀자를 선별해 채용했다.(일본 동양방적 100년사, 1983.참조)그러나 그 해 8월 동양방적 인천공장은 남녀 직공 모집 공고를 했는데, 3월 입사 지원 대소동과 달리 모집 정원을
조선총독부의 공장법 유예 조치로 일본 본지 공장의 3교대 8시간 근무제가 조선 내 공장에서는 2교대 12시간 근무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시간이 15시간 30분 이상이었다. 휴식시간 30분씩 보장되었지만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다. 단지 식사시간 45분과 15분의 휴식시간만 허용되었을 뿐이었다.일본 본지 공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근무여건이었다. 공장법 제정으로 15세 이하 청소년 노동자들은 철야노동을 금지되었다. 철야노동은 청소년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풍기상 많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이를 금지시켰다.
민족 차별을 통한 일본 대기업의 이익 극대화 조선총독부는 조선 진출하는 일본 대기업 공장에 공장법을 적용하는 조치를 유예하고, 2교대 야간근무제도 허용했다. 또한 16세 미만 청소년도 고용을 허용하는 특혜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노동 강도는 일본공장보다도 더 강화되어 노동시간이 길게는 15시간 30분 이상 중노동도 가능했다. 휴식시간이 30분씩 보장되었으나, 이마져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단지 식사시간 45분과 휴식시간 15분만 허용될 뿐이었다.일본정부는 청소년 노동자들이 철야작업을 하는 것은 건강상 적
공장유치를 위한 특혜-공장부지 지원, 저임금 보장, 노동규제 없는 공장 운영 보장 조선총독부는 일본 대기업 공장 유치에 적극 나섰다. 공장부지 확보 지원, 저임금 보장, 노동 규제 없는 공장 경영, 공장 설비 지원까지 제시했다. 일본 대기업은 공황 여파로 일본 국내경기가 침체되면서 조선,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조선은 폭넓은 소비시장과 풍부한 원료 공급지를 갖추고 있는 천혜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일본 대기업은 조선총독부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일본 대기업이 조선에 공장을 설립하는 것에 적극적 태도를 보이자
1. 연재를 하면서필자는 12년 전 강원도 평창 자택에서 가진 조화순목사님과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1970년대까지 이르는 「인천 동일방직 노동운동 전사」를 집필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1970년대 동일방직의 민주 노동운동의 뿌리는 1934년 인천 동양방직 노동자의 적색노조 운동이다. 1946년 6월 전평 동양방직 인천공장 분회의 상경 파업투쟁은 전평이 미군정으로부터 대표권을 인정받는 성과를 얻게 한 획기적 사건이었다. 1970년대 ‘똥물사건’으로 상징된 동일방직 민주 노동운동 역사의 한계를 뛰어 넘어 40년 동일방직 진보 노동운
석연봉은 1915년 신화수리에서 태어났다. 1922년 영화심상보통학교를 입학하면서 야구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1927년 제 2회 전인천소년야구대회에 신화수리 소년팀 주전으로 출전해 결승전에서 사정소년군을 11:5로 승리해 우승했다. 석연봉은 서울 배재고보로 진학해 배재 야구팀 주전선수로 활동했다. 배재 야구팀에는 인천에서 같이 활약한 지성룡, 이수봉, 장귀남, 김태봉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인천 한용단 소속 고려야구단에서 주전선수로도 활약했다.석연봉이 활약한 고려야구단은 청년단체 한용단 소속 야구팀이었다. 원래 한용야구단이었으나 일본
한국전쟁 직전에는 주간에 분뇨를 수거 처리하였다. 종전 직후부터는 분뇨 수거를 야간에 실시하였다. 주간에 분뇨를 실은 우마차가 시내를 다니는 것 지체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도시미관상 또 외국인에게 불쾌한 이미지를 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분뇨 수거 작업을 야간에만 실시하였다. 분뇨 수거 신청 가정에서는 황색기를 달아 놓으면 분뇨 수거 마차가 알아서 야간에 처리하였다. 인천시는 우마차 50대를 배차해 각 동마다 2일씩 분뇨 수거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인천시는 30만석 인분뇨를 저장 처리하는 탱크를 설치하였고,
인천지역 농가에서 경작기가 되면서 비료 기근 현상이 심각해 서울 시내의 똥오줌 수거 마차 820대 분을 확보해 농가에 배급하였다. 이전에는 중간 업자가 개입해 수익을 얻기 위해 비싸게 매각하였다. 경기도 보건후생부에서 직접 수거해 농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였다. 서울시는 이로 인해 똥오줌 처리 문제 해결 및 서울시 수입이 증가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졌다.(대중일보 1946.3.20)겨울철이 되면서 인천시내 오물 청소가 원활하지 못해 생활 위생 및 청결 유지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다. 특히 각 가정의 변소의 똥오줌을 수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