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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인천 보안대장, 이임옥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해방직 후 애관극장(인천보안대 결성)-김식만 네이버 블러그

조봉암은 일제 말기 인천미강업조합장으로 지내다가 1945년 1월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일본헌병대에 예비검속 되었다가 해방 다음날 오후에 석방되었다. 곧바로 인천 도원동 자택으로 돌아온 뒤, 그날 저녁 그를 찾아온 여운형을 만났다. 시국에 관해서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김영일, 격동기의 인천, p.481~482)

실제 여운형이 인천으로 조봉암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서울 헌병사령부에서 석방되기 직전 면담을 하였다고 한다. 조봉암과 여운형과의 관계는 1920년대 초부터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계열로 조봉암이 속했던 고려공산당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후반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생활한 바 있는 동지이자. 사상적 스승, 사형이었다.(인천일보, 2011.5.25. ‘치안유지회 기반, 건국준비 발빠른 움직임’)

1945년 8월 16일 저녁 인천 도원정 자택으로 내려온 즉시 조봉암은 청년 20여명과 시국 현안을 논의하고, 건준과 보안대 조직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보안대 조직 결성 준비에 박차를 가하여 1945년 8월 20일 경동 애관극장에서 관계자 20여명이 모여 인천보안대 결성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인천 경찰서 유도 교관 출신 이임옥은 보안대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임옥은 내동 영화보통학교 내 사무실을 두고, 조직 확대에 박차를 가해 200명의 대원으로 확대하여 인천지역 치안유지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김영일, p.282) 실제로 인천보안대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화수동 건달패였다고 하는데 이는 권충일이 인천보안대 결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임옥은 인천 보안대장으로 일본경찰을 대신하여 인천지역 치안을 책임지는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인천 보안대장: 이임옥

보안요원: 박봉수, 김욱한, 노백린, 박주선, 김경수, 심상호, 정상진, 강성남, 이석우, 홍두만 등

▲ 1929.7.4.동아일보 유도승급고사

인천 보안대장 이임옥은 제주도 태생으로 일제 강점기때 인천경찰서 유도사범(공인 4단)으로 경찰관에게 유도를 지도해 온 바 있고, 이복형 김기봉은 동인천역에서 소규모 식당을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시 인민군이 점령할 때 부역하였다가 월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김영일, p.486)

제주도 태생인 이임옥이 인천에 정착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이임옥은 1929년 6월 29일 인천무도관 창립 2주년 기념 유도시합 고사에서 엄익성과 함께 공인 2급 합격하였다. 이 승급시합 고사에서 권충일도 공인 2단으로 합격하였다. 이임옥은 어린 시절 인천으로 이사와 인천무도관에서 유도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 1929.7.4.) 당시 인천무도관에는 제주도 출신 권투선수 신태영이 인천권투구락부 사범으로 활약하고 있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을 통해 이임옥은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고, 이후 이들의 절대적 영향 아래 활동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1938년 7월 7일 인천무도관 주최 연전 유도부 초청 유도시합이 율목정 인천무도관 도장에서 열렸다. 연전 유도부는 인천무도관 설립을 주도하였고, 관장 유창호의 스승 강낙원이 지도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 저녁인데도 200여명의 관객이 몰릴 정도였다. 이임옥은 인천무도관 소속 선수로 출전하여 연전 조경룡에게 패배, 오성옥에게는 승리하였다.(조선일보, 1938.7.8.)

해방 후, 이임옥은 인천체육협회 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사장은 신태영 상급 이사로 김석영, 김수복이었으며, 이임옥은 김수복, 남종태와 함께 유도부 이사가 되었다.(대중일보, 1945.10.10., 조준호, 인천체육사연구,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2014.

p.123)

그리고 1945년 11월 인천경찰서 경무주임으로 발령을 받기도 하였다. 인천 군정관 스틸맨 소좌가 인천 경찰서를 접수하면서 김윤복을 인천경찰서장으로 임명하면서 인천보안대 조직을 대거 인천경찰로 발령을 하였다.(김영일, p.488) 보안대장 이임옥을 경무주임으로 발령한 의도는 인천 각지역 보안대장을 하면 인천 치안 유지에 많은 역할을 해왔고 인천 전 지역에 보안대 조직이 있어 치안 안정에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6년이 되면서 미군정은 경찰조직을 우익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일제 시대때 경찰로 활동한 바 있는 인물들을 대거 불려 들임으로써 좌익진영의 인천보안대 출신 인천 경찰도 입지가 서서히 좁아졌다. 결국 이임옥도 이들에 의해 진행된 인천경찰서 숙정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서 물러났다.

1946년 2월 9일 밤 9시 인천경찰서 2층 유치장에서 강도, 강간 혐의로 체포된 이주영과 안두호가 사식을 넣을 때 숨겨 들어온 쇠톱을 이용하여 쇠창살을 자르려다가 숙직 경찰 이조욱 경부보에게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치장 감시 순경이 고의로 수감 중인 강도 피의자를 도주시킨 사건을 트집 잡아 인천보안대 출신 경찰관을 대거 숙정하는 기회로 삼았다.(김영일, p.489)

1946년 3월 4일 윤영만 순경 순직 영결식장에 참석한 친일파 경찰로 유명한 노덕술을 내세워 인천보안대 출신 경찰관 22명을 용의자로 몰고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김영일, p.489)

▲ 인천보안대 사무실(영화보통학교)

이후 이임옥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가 2008년 8월 16일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성공회 성당 신도 회장 이**와의 인터뷰에서 이임옥에 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임옥은 온수리 정미소를 운영하는 광산 김씨의 딸과 결혼하여 당시 온수리 일대에 화제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정미소 딸은 미모 뿐만 아니라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으로 당시 강화 지역 청년들의 선망이었다고 한다. 이임옥은 한국전쟁 인민점령시기에 인민군 대좌로 나타나 인천지역에 나타났다가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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