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운동경기 활동

인천배재학우회(이하 인배회)는 대중 교양선전활동 일환으로 토론회를 1922년 초까지 활발하였다. 당시 청년운동에서 청년에 대한 교양문제는 핵심 문제였다. 인배회는 토론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공간으로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러나 1922년 초 이후부터는 이러한 인배회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1922.1.23. 동아일보, 1925.6.21. 동아일보. 1922년 1월 23일 ‘사회를 정돈함에는 노년이나 청년이냐“ 주제로 토론회가 열린 이후 토론회가 없다가 1925년 6월 21일 ’우리의 생활을 진보시킴에는 학문? 실업?‘ 주제로 다시 열렸다.)

또한 인천내리의법청년회 조직이 크게 확대되면서 인배회 회원 중에는 내리의법청년회 임원(윤대석, 홍호, 김택영, 김희영, 한상봉 등)을 겸임하면서 내리의법청년회 정기토론회가 활성화되면서 운동경기, 웅변대회, 초청 강연회, 음악회 등 다양한 청년활동으로 확대하였다.

인배회는 인천지역 청년단체와 각종 운동경기에 출전하여 지역 청년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는 등 연대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배재고보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운동경기를 통해 강한 동문의식과 애교심을 더욱 돈독하게 하여 왔던 관계로 탄탄한 팀웍과 결속력으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 배재학당 교훈비  출처: 배재학당사

1922년 3월 5일 인천부 산수정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전인천축구대회에 출전하여 예상을 깨고 강적 한용단을 이기고 우승하였다. 인배회의 존재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배회 축구단은 인천 포목상 정문식의 기부로 자동차 2대에 승차하여 단기와 우승기를 들고 인천시가지를 행진하였다.

▲ 1922년 제 1회 전인천축구대회 우승기념 사진 출처: 신태범의 인천 한세기

1923년 9월 16일 경성 청소년축구대회 우승팀 수진구락부를 초청하여 경인소년축구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인배회도 참가하여 수진구락부와 경기를 하였다

1924년은 인배회 내부 문제로 각종 운동경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가 1924년 10월 30일 직제개편 이후로 인천지역 각종운동경기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천지역 각 운동단체간의 갈등으로 분열되는 바람에 운동경기가 크게 위축되어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25년 11월 17일 인천 지역 청년단체는 인기 종목인 축구경기를 정기적으로 운동경기를 부활시키기로 하고 인천축구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1월 23일 전인천축구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참가 단체는 인배회를 비롯해 인천 보성고보학우회(이하 인보회), 제물포청년회, 고려단, 소소단, 화수리청년단이었다.

1927년 11월 9일 인배회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에서 인천상업학교, 통학생친목회, 인천고려체육회, 율목리 체육단, PYZ회, 인보회의 대표자 모임에 참여하여 인천축구연맹을 재조직하고 산근정 공설운동장에서 전인천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

1924년 2월 10일 제물포청년회 주최 제 1회 전인천빙상대회가 송림리 스케이트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인배회도 선수를 참가시키는 등 인천지역 운동경기에 선도적으로 참가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웅변대회

인배회는 1924년 1월 21일 내리예배당에서 동아일보 인천지국 후원으로 인천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독지가 장석우가 은컵을, 동아일보 인천지국에서 은메달을 기증하였다. 인천지역에서는 처음 열리는 웅변대회로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배재고보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대중적 폭발력을 갖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웅변을 강조하였다. 교내웅변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식민지 지해하의 지식인 청년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현실의 고통과 고뇌를 풀어가는 방법 중 하나였다.(이덕주, 배재학당 통사, 2014.) 인천웅변대회는 답답한 민족현실에 대한 청년으로서의 불만과 격정을 쏟아놓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 인배회의 각종 행사가 열렸던 인천 내리예배당 출처: 내리교회

인천웅변대회는 인배회 회장 이길용의 개회사로 시작하였는데 큰 성황이었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내리교회 담임목사 신홍식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찬조출연으로 경성 중학동 우리구락부 음악반의 만돌린, 바이올린 합주와 독주「」가 있었고, 경성통학 여중생 합창이 있었다. 사은품도 풍성하게 제공되었다. 잡지 「배재」10부(경성 배재청년회), 「京城記略」, 「경주기행」 각 10부(경성 배재고보), 「청년」 10부(경성 청년잡지사), 「성애」10개월 구독권, 경성 한성도서주식회사 서적 약간, 인천 임재하씨 금일봉을 기부받았다.

그리고 인천부내 각 청년단체에서 적극 참여하였다. 이우구락부 대표 김헌식, 조선물산소비조합 대표 김수옥, 인배회 대표 정태희, 제물포 청년회 대표 배권국, 리비도의 열변이 있었다. 주된 내용은 조선사람으로 이 지경을 벗어나 잘 살아보자는 부르짖음이었다. 입상자는 다음과 같다.

 

1등 조선물산소비조합 대표 김수옥

2등 의법청년회 대표 이범진

3등 한용청년회 대표 정수일

4등 의법청년회 대표 장기진

5등 인배회 대표 엄영섭

 

인천웅변대회는 합법적 집회에서 평소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마음껏 쏟아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천 각 청년단체에서 선정한 대표가 나와 각 단체의 활동영역을 보여주고 평소 담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 바리였기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웅변대회를 통해서 식민지 현실에 새로운 인식과 지각을 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근성정미소 대표 유근성은 기부금 5원을 내는 등 큰 호응을 얻었던 행사였다.

1924년 12월 27일 인배회는 제 2회 전인천웅변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아일보 인천지국이 후원하기로 하였고, 대회 강령과 심사규정을 정하여 열기로 하였다.

 

본 대회는 인천부내 각 단체의 웅변 우승권을 결정함

우승컵 수령 단체에서는 차기 대회까지 보관 시 책임이 있음

연사는 매 단체에 2인 이내로 발언 순서는 당일 추첨으로 정하고 연사 1인이 두 단체 연사권을 유함을 불득하며 연제를 본대회 목적 범위 내로 함을 요함

심판은 본 대회 소정에 의함

발언시간은 본대회에서 임시로 정함

등단을 선언한 후 5분 이내에 등단 아니하는 연사는 사정으로 판단함

제정에 불복하는 단체에 대하여 퇴장을 명함을 득함

 

1925년 1월 15일 제 2회 전인천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내리예배당에는 천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회장 엄영섭이 개회사를 하였고, 제1회 우승자 김수옥이 우승컵을 반납하였다. 찬조출연한 여학생 2명의 중창이 있었고, 인배회 대표 정창민의 “같이 살자” 열변으로 시작하여 의법청년회 대표 신대균의 웅변으로 끝마쳤다. 심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1등 의법청년회 연사 신대균

2등 제물포청년회 연사 이승엽

3등 제물포청년회 연사 유두희

인배회 연사 정만기

인배회 연사 차태열

의법청년회 연사 송재봉

 

실제 대회 진행은 인천부내 청년단체에서 임의 선출한 연사를 선정하였고, 연제도 연사가 임의대로 정하도록 하였다. 순서도 당일 추첨으로 정하고 15분간 발표하였다.

 

음악회

1922년 5월 17일 인배회는 소년가극대회를 개최하였다. 회장 홍호의 사회로 경성 중앙예배당 주일학교 20명의 「낙원의 소녀」 가극공연이 있었다.

1923년 10월 7일 우각리 주일학교 운영을 위한 중국, 일본, 조선 3개국 어린이들이 참가하는 동양음악대회를 공동 개최하였다.

1925년 7월 15일 인배회 주최로 시민위안음악연주대회를 개최하였다. 입장료는 무료였고, 작곡가 홍난파의 숙부인 홍호의 주선으로 경성의 유명 음악가를 초청하여 악기 연주 및 성악 10여곡을 공연하였다.

1931년 10월 24일 인배회 창립 11주년 기념식을 내리예배당에서 거행하였는데 경인음악가의 공연과 강연회를 가졌다.

1932년 11월 26일 인배회 창립 12주년 기념음악회를 내리예바당예배당에서 개최하였다.

 

강연회

강연회는 대중 교양선전활동의 일환으로 중요하게 개최했던 행사였다. 강연자들은 주로 청년단체의 지도자는 물론 국내의 선진학자들을 초청하였다. 보통 2-3 시간 진행되었고, 자유 등단의 기회도 부여하였으며, 악기 연주 및 독창, 합창 공연도 있었다.(박철하, 청년운동,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p.27)

1930년 10월 25일 인배회 주최의 첫 초청었다. 초청 연사는 배성룡이었다. 배성룡은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하면서 일제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피해자라고 본 사회주의 경제학자였다.(위키백과 배성룡편)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의 경제 현실에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중층적으로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파악하고 일본인 자본 대 조선 민중의 대립을 기본 모순으로 상정했다. 조선인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모두를 일본 자본주의에 의한 공동의 피해자로 파악하 강연회가 개최되면서, 민족협동전선론을 주장했다. 8·15해방 후에는 중도파로서 좌우익의 편향노선을 비판했다.

1931년 10월 24일 인배회 창립 11주년 기념식을 경성 보성전문학교 법학 교수 옥선진 초청강연회로 개최하였다.

1933년 11월 27일 인배회 창립 13주년 초청강연회를 내리예배당에서 개최하였다. 초청연사는 조선일보 홍양명, 보성전문교수 이관구였다.

인배회는 192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인천 청년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며, 이 같은 인배회의 활약은 다른 지역의 배재동창에게도 영향을 끼쳐 1929년 7월 29일 화성학원에서 수원배재학우회를 결성하게 하였으며. 1933년 2월 평북 배재학우회가 결성되어 인배회와 동일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인배회의 사회운동은 전국 배재학우회 결성을 촉진시켰고, 미국과 일본에서도 재미 배재동창회, 재일 배재동창회 결성으로 확장되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이덕주, 배재학당사, p.349~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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