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부길 작가

봄철이면 한창 살이 오르고 장(알)이 꽉 찬 꽃게를 나는 좋아한다.

어느 날 덕적도에 있는 친구 K의 초청도 있고 휴식도 취할 겸 꽃게 집산지인 그 섬을 찾았다. 그가 낚싯배를 운영하니까 처음에는 낚시놀이가 생각났지만 실은 싱싱한 꽃게 맛을 보자는 저의가 짙게 깔려있음을 섬에 도착할 무렵에야 깨달았다.

덕적 북리포구에 내리니 방파제와 물양장 그리고 선착장 등이 오래전 그대로 변함이 없다.

지금은 서해 꽃게잡이 하는 전진기지로 변했으나 예전에는 덕적도에서 ‘배운 체하지 말라’는 말처럼 중선(안강망) 어업이 활발하여 여유 있는 선주들이 많아 육지로 자녀들을 유학 보냈던 부자동네였다.

1960년대 후반까지 덕적 해역을 포함하여 연평도에서는 속칭 ‘3떼’라는 말이 유명했는데 조기떼를 따라 어부가 떼를 지어 올라오고 그 뒤를 술집색시떼가 쫓는다는 말인데 그만큼 조기 어장이 파시(波市)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선의 대형화로 조기 월동지인 제주도 남쪽 2백 킬로미터까지 쫓아가 조기를 잡아내니 ‘3떼’는 어느덧 사라지고 게다가 어선 납북 등 북한과의 관계가 첨예화되자 서해어로보호본부가 덕적도로 축소 이동하게 되었다.

나는 어느 해 봄 본부 요원으로 다른 동료 다섯 명과 함께 육지에서 파견된 적이 있다.

기간은 대략 2개월 정도였는데 나만 총각이었고 나머지는 3, 40대의 기혼자들이었다. 야간에는 전기가 없어 호롱불 밑에서 라디오를 청취하는 것뿐이니 그야말로 귀양살이처럼 갑갑하였다. 때문에 저녁에는 모여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어버렸다.

마침 그곳에는 태풍 사고로 홀로된 비슷한 처지의 여인네들이 몇 명 있었다.

우두머리 격인 여인한테 슬쩍 연락해놓으면 그날 저녁에 어느 집에다 보리막걸리와 생고구마 말린 것, 생선구이 등을 준비해 놓는다. 물론 서넛의 여인들도 모이는데 처음에는 고개도 못 들고 수줍어하다가 막걸리 몇 잔에 홍조 띤 얼굴이 되고 이내 시름을 잊고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특히 재주가 많은 장선배가 주선을 담당했는데 그는 만취가 되면 고의적(?)으로 쓰러져 자버렸고 그런 때를 제외하곤 거의 내가 부축하거나 업고 하숙집으로 데려왔다.

20대 초반인 내가 그 자리에 낀 것은 순전히 선배들 뒤치다꺼리 때문이었으나 내 딴에는 어느 여인을 위로하고 싶은 순진한 마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외로운 처지의 남녀들이 고요한 달빛과 반짝이는 물결 속에 파묻혀 취기에 서로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낭만의 시절이었다.

3월부터 시작된 꽃게잡이가 금년에는 유난히 흉작이라 현지에서도 킬로그램 당 3만 원이나 되어 쇠고기 값의 두 배다. 실컷 먹기는커녕 탕으로 대신하고 보니 어물도 많았고 인심도 후하던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꽃게가 흔하여 조기 그물에 덤으로 붙어 오르면 갑판 위에서 삽으로 짓마버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귀한 식탁에나 오르는 진품이 되었으니 아쉽기만 하다.

꽃게란 놈은 희한하게도 투박하고 각(角) 진 딱딱한 등딱지에다가 일곱 마디로 짜여진 하얀 복부에 다섯 쌍의 발로 횡보(橫步) 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다. 집게발은 무섭고 사나운 그들의 무기로 한번 물렸다 하면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아프다.

그러나 그 껍질 속의 희고 탄력 있는 속살은 맛있고 영양가가 풍부한데다 ‘익스트랙트’라는 단맛 성분 때문에 남녀노소가 다 좋아하는 수산물 중의 하나다. 수산물 가공회사에서는 그런 성분을 이용, 앞다투어 북양명태살에 향료와 착색제를 넣고 ‘게맛살’이라는 어묵을 개발하여 국내외에서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꽃게는 단백질, 당질, 무기질이 풍부하고 가식부(可食部)가 40퍼센트로 다른 종류에 비해 2, 3배 많다.

어린 시절 초여름 석양녘, 콩나물 두부 행상이 지나간 동네 어귀로부터 볏짚 가마니에 꽃게를 가득 실은 아저씨의 걸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온동리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진다. 저녁 준비에 부산하던 내 어머니와 같은 동네 아낙들은 앞치마에 손을 훔치면서 재빨리 문을 나서고 우리 같은 애들은 양재기 한 둘씩 들고 쏜살같이 뒤쫓는다. 보다 싱싱한 놈을 고르기 위해 리어카 앞자리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집게발을 하늘로 벌린 채 눈을 잔뜩 세우고 공격 자세를 취하는 놈을 순간적으로 부채발을 낚아채 양재기에 던져 넣는 것은 스릴이 넘치는 일이었다. 아차 실수하는 날이면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고 남의 아픔을 재미있어라 했던 악동 시절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별로 못 느끼지만 그때만 해도 더위가 시작되면 여름을 타느라 입맛을 잃곤 했는데 영양공급이 여의치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물 좋은 꽃게탕이야말로 밥맛을 돋우는데 제격이었다. 물론 애호박과 풋고추를 넣은 매운탕에 불과하지만 서민의 음식으로 별미 중 으뜸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집안 대소사 때 빠짐없이 준비되는 것은 우리 어머님의 꽃게요리였다. 지금은 연만(年滿) 하시어 형수의 손길로 이어져오고 있지만 예전 맛을 느끼지 못하니 피난길 임금님의 ‘도루묵’ 반환 소동 같은 것으로 치부하면 어떨는지.

그러나 두 분을 통하여 보고 듣고 알게 된 꽃게요리 방법을 생각하면 더욱 친근해져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꽃게요리 중 으뜸으로는 게장을 치는데 4~6월 중 노란 장(卵)이 꽉 찬 살아있는 놈의 등껍질을 떼고 끓인 간장에 수회 적신 후 반나절 재운 뒤에 생강, 마늘,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린 것을 뜨거운 쌀밥과 먹으면 한마디로 밥 서너 공기는 거뜬하다.

꽃게장 백반으로 유명하여 내가 자주 찾는 ‘골목집’이 있는데 주인아주머니는 점심때 준비한 하루 분량이 다 나가면 영업을 끝내버린다. 내일 팔 거라도 조금 달라고 사정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유인즉 숙성시키는 시간과 맛이 배어 나오는 시간의 조절 때문이라고 하는데 음식에 대한 고집스런 장인정신이 손님을 그치지 않게 하는 비결인 듯싶다.

매운탕은 먹기 좋게 토막낸 후 호박, 무, 풋고추, 붉은 고추, 대파 등을 준비한 후 고추와 고춧가루 끓인 물에 함께 넣고 간을 맞추면 얼큰하고 단맛이 일미다. 그러나 탕은 역시 대파와 쑥갓에 후추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 백숙(白熟)이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데 소래포구 어느 집에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꽃게찜은 산 채로 찜통에서 찐 후 모든 살을 빼내 양념하고 계란과 버무린 다음 등딱지에 담아 실고추 등으로 꾸며 약간 구운 후 먹는데 맛은 좋지만 손이 많이 가는 것이 흠이다.

또한 살아있는 게살로 회를 즐기기도 하는데 배를 타고 나가면 살을 도려내기 힘든 어선 위라 도마에 꽃게 전체를 잘게 쪼아 즉석에서 초간장에 버무려 먹기도 했다. 그러나 장이 가득 찬 암놈을 김(수증기)으로 쪄서 겨자간장에 찍어 먹는 맛이 최고라고 하는 이도 있다.

늦은 가을에는 싱싱한 놈을 소금가마니에 통째로 박아 두었다가 게장이 익은 한겨울 따뜻한 방에서 먹는 맛이 제법이다. 그 종류만큼 조리방법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 같은 꽃게요리는 살아있는 놈으로 해야만 제맛을 낸다. 죽은 놈은 그만큼 값어치가 떨어진다. 이렇듯 미물(微物)마저도 生과 死의 가치는 엄연하다.

산 같이 큰 고래도 둥둥 떠서 물결에 흘러가고, 한치가 못 되는 피라미는 산 같은 여울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지극히 모험적이다. 생명의 발견은 곧 모험의 역사다.

친구의 낚싯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갔으나 꽃게는 별로 잡지 못했다. 꽃게는 귀해지나 그에 따라 추억은 새로워진다. 내년에는 꽃게 풍년이 들겠지.

저작권자 © 인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