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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 조선기계제작소이성진 (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인천에 진출한 일본기업 중 조선기계제작소는 매우 특이한 활동을 한 기업으로 손꼽힌다. 어쨌든 해군이 아닌 육군 제 7기술연구소가 히라가나 ‘ゆ’를 ○로 둘러싼 형태인 암호명 ‘마루유’로 비밀리 개발한 잠수함, 삼식잠수운송정을 건조하는 특별한 업무를 시행하였다. 조선기계제작소는 1937년 6월 설립되어 등기상으로 본사는 경성에 두고, 공장은 인천부 만석정에 두었다. 당시 조선에 다수 존재하는 광산개발 붐을 타고 광산채굴 기계와 토목기계를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親)회사는 도쿄도(東京都) 죠토구(城東区, 現 고토구 江東区) 오시마(大島)에 소재한 요코야마공업소(橫山工業所-보일러, 분쇄기 특허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였다.)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대리회사(가짜회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회사가 어떻게 경영을 하게 되었는가는 상세하게 후술하도록 한다.

당시 광산 개발 붐이 조선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으며, 미쓰이(三井)계열의 산세이광업(三成鑛業), 니혼광업(日本鑛業), 미스비시금속광산(三菱金屬鑛山) 등이 금, 은 , 구리, 아연 등 희소금속 광산 개발에 경쟁적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에 국한하지 않고 만주(중국 동북부)까지 일본 개척단이 들어가 토목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한 개발 붐에 편승해서 조선기계제작소는 광산채굴기계 매출이 호조를 보였다. 조선기계제작소를 설립한 지 1년도 안되어 당초 자본금 50만엔(한화 약 500만원)에서 300만엔(한화 약 3,000만원)으로 5배 증자하였고, 2년 후에는 배액 증자를 하였다. 창업 직후부터 수익을 내서 2년째부터는 6% 배당도 하였다.

「인천을 사랑하는 모임」 홈페이지 관리인 이노우에 고이치(井上浩一)의 외할아버지, 모리모토 히로시는 도쿄시청(東京市役所)¹를 사직하고 1938년 3월 조선기계제작소에 입사하였다. 서기(사무원)로 인천으로 부임하였다. 이노우에는 “할아버지가 왜 인천에 갔는지 경위를 알 수 없다. 아키타 키요시(秋田淸)대의사(代議士) 집에서 서생으로 있었던 적도 있기에 그 관계로 인천에 오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 [출처: https://jinsendayori.jimdo.com/]

¹1889년부터 1943년 사이에 존재했던 시. 현재는 도쿄도.

조선기계제작소 초대 사장 모리 테루히토(森輝)이다. 그는 다름 아닌 쇼와전공(昭和電工) 창시자 모리 노부테루(森聶昶)의 친동생이다. 쇼와전공(昭和電工)의 전신 쇼와광업(昭和鑛業) 등 여러 회사의 이사를 겸임하면서 인천으로 와서 조선기계제작소를 관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력지(이니로쿠 신보(二六新報)) 경영도 맡고 있었던 듯하다. 모리모토 히로시(森本寬)는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日本 中央大學 法學科) 재학 중 야간에는 이니로꾸 신보(二六新報)에서 일하였다고 한다. 이때 일하는 태도를 눈여겨 받던 모리 테루히토(森輝)가 조선기계제작소로 이끈 것이 아닐까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모리 테루히토(森輝)는 일본 유력지 이니로꾸신보(二六新報)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 조선기계제작소 초대 사장 모리 테루히토(森輝) [출처: https://ja.wikipedia.org/wiki]

모리모토 히로시(森本寬)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당시 인천은 일본 대기업의 진출로일본인 직원의 주택난이 극심하였다고 하였다. 조선기계제작소 직원 모리모토 히로시(森本寬)는 송판정(현 송월동)에서 화수리로, 화수리에서 만석정으로 2-3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간부 사원들에게 걸맞는 사택을 제공해 주기 위한 회사 측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²

²동아일보 1935년 8월 25일자에 이로 인한 화수정 주민들은 철거령에 의한 피해를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인천 조선기계제작소 화수정 백여호에 철거령 주민 등은 이전비 증액을 요구 주목되는 금후 귀결‘

모리모토 히로시(森本寬)의 편지에는 1939년(昭和 14年) 조선기계제작소 직원은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모리모토가 1942년 노무과장으로 승진 직후에 대규모 직원 채용을 실시하였다. 일본 본토로 출장을 나가 직접 500~600명의 직원을 채용했다는 편지가 있기 때문에 그 당시 조선기계제작소 직원 수는 적어도 1,500~1,60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 후 잠수함 건조를 생각하면 종전 시에는 3,000명 규모의 대기업이었다고 생각된다.³

1944년(昭和 19年)부터 1945년(昭和 20年)까지 인천중학교 재학생이 근로보국대로 동원되어 조선기계제작소에서 일하였다.

출처: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著 ‘仁川の 七十年’ 2018.4.17.

 

[필자 소개]

요시하라 이사무(吉原 勇)

1938 년 경기도 출생. 마이니치 신문 경제부 기자, 편집 위원, 下野新聞社 이사, 作新学院大学 강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특명 전근」(문예 춘추사) 「내린 일장기」(신쵸 오샤) 등.

2018년 5월 19일 인천을 방문한 요시하라 이사무씨로부터 번역 게재 허락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또한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일본어 교육전공 이태영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였음을 밝힙니다.

 

³2006년 10월 강화군 불은면 불은면사무소 뒤편에서 만난 심**(당시 82세)는 1942년부터 조선기계제작소 기술직 직원으로 입사하였다고 한다.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학비지원을 해 주던 백부의 사망으로 인해 중퇴를 하였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와다나베 교수가 조선기계제작소를 소개해서 취업을 했다고 한다. 공장 생산직원으로 일하는 게 아깝다고 하면서 노무과 직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 직후까지 조선기계제작소 노무관리 사원으로 일하였다고 하였다. 해방 직전까지 제 1, 2 공장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제 1공장에서는 1단계 작업으로 조선인 노동자와 동원된 근로보국대원들이 단순 부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분업생산체제로 단순 부품만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인원은 1,500명 정도였다고 한다. 2단계 작업은 조선인, 일본인 기술직 공원들이 1단계 부품으로 중간 조립을 하였다고 한다. 2단계에서도 최종 조립단계에서 어떤 제품이 생산되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인원은 1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제 2공장에서 최종 조립을 하였는데 극비로 500명의 일본인 전문직 공원과 소수의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 조선인 사원만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해방 직전 조선기계제작소 직원은 3,000명 정도였다고 말한 바 있다.

손경옥 기자  press@incheo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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