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 김삼룡의 사회주의 노동자가 되기 전 과정

▲ [동아일보 1950.4.1.]

김삼룡은 1928년 3월 충주 엄정면 용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4월 상경했다. 보통학교 1학년 담임교사 이형래를 통해 불합리한 삶을 강요하는 식민지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신분계급이 고착해 있는 한 가난으로부터 해방할 수 없다는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가졌다.

스승 이형래와 함께 상경한 김삼룡은 이준열이 세운 고학당에 들어갔다. 동대문 밖 도축장 안 창고에서 문을 연 무산계급 학교였다. 학생들이 장사를 하기도 하고, 소연극 공연 등을 통해 자발적인 학교운영비를 모금하였다. 고학당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김삼룡은 사회주의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갖고 각종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체졔적으로 학습하기 위해 배재고보 김병선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1930녀년 12월 김삼룡이 독서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한다는 첩보가 경성부 서대문경찰서 정보계에 입수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1931년 김삼룡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채석장 사역을 하면서 사회주의 혁명가 이재유를 만났다. 이재유는 1930년 11월 제 4차 조선공산당재건사건으로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고 복역중이었다. 당시 이재유는 폐결핵 초기 환자로 먼지가 많이 나는 채석장 사역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강한 까닭에 일본인 간수에게 구차한 부탁을 하지 않았다. 김삼룡은 이를 목격하고 직접 나서서 도움을 주었다. 이재유의 채석장 사역을 대신해 줘 간간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김삼룡이 이재유를 지극하게 돌볼 수 있었던 것은 수감자들 사이에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가등했다. 김삼룡을 직접 목격했던 노촌 이구영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보았을 때 김삼룡은 정말 무산계급의 일꾼처럼 생겼었다. 민주투사처럼 털털하게 생긴 모습으로, 권투에 단련되어 콧날이 서지 않고 뭉툭하게 패였던 것을 기억한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감옥에 있을 때도 수용자끼리 벌어지는 싸움이란 싸움은 그가 도맡아 말렸다고 한다. 싸우는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싸우려면 자기를 때리라고 하면서 싸움을 말렸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누구든지 감화를 받을 정도로 서민적이고 수수하다는 인상을 받았다.”(심지연, 역사는 남북으로 묻지 않는다. p.131-132)

이재유는 김삼룡의 소탈한 성격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조직 능력을 크게 인정해 출옥 후 인천 지역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을 전개해 줄 것을 제안했다.

1932년 2월 김삼룡은 만기 출소해 곧장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회주의 운동하다가 감옥에 갔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크게 추앙되어 대환영을 했다. 고향에 칩거하면서 일제의 수탈에 순응해 농민들을 조직해 사회주의 교양교육을 실시했다. 김삼룡의 사회주의 교양교육을 통해 의식화된 농민들은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원으로 대거 학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충주 엄정면은 김삼룡의 영향으로 좌익이 많이 생겼다. 전쟁이 난 후 그곳에서만 보도연맹으로 800명이 죽었을 정도로 마을 전체가 좌익이었다."(전게서, p.132)

1932년 12월 22일 이재유는 징역 3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했다. 수감생활 중 폐결핵으로 고생한 까닭에 일정기간 요양시간이 필요했다. 1933년 2월 김삼룡은 이재유를 방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결정한 바 있는 인천 지역에서의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에 관한 실제적 실천 구상을 협의했고, 가급적 노동현장에 직접 들어가 그 현장 속에서 노동자 동지를 표섭하고 그들을 기반으로 하는 단단한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전환한다는 당재건 방식을 채택했다.(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2. 김삼룡, 인천 적색운수노동조합 조직

1933년 5월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트로이카를 결성하기 위해 경인지역 노동자와 학생들을 포섭했다. 김삼룡도 곧장 이재유의 지시를 받고 인천으로 와서 인천항 하역노동자로 취업했다. 첫 포섭대상자는 1929년 원산총동맹파업에 적극 가담해 원산경찰서 체포를 피해 인천으로 와서 인천항 하역노동자가 된 이백만이었다. 곧이어 인천 토박이 이석면을 포섭해 이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적색운수노동조합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김삼룡은 인천에서, 이재유는 경성에서, 이관술은 영등포와 학생조직을 맡아 트로이카 조직방식을 채택해 본격적인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트로이카의 조직형태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권력을 독점 행사하지 못하고 하부조직은 물론 상부조직까지 세 명 이상이 한 조가 되어 공동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민주적 상향 조직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트로이카 조직방식을 택한 이유는 김삼룡이 서울과 인천에서 혁명적 노동조합 결성을 하고자 했을 때 이미 기존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상당히 있었다. 다른 계통의 사회주의 활동가까지 포섭해 보다 많은 동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이유는 만일 경찰에 검거될 경우 조직 전체가 드러나 와해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각 조직원들의 자발성과 자주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로이카 조직사업은 가급적 노동현장이 중심이 되는 사화주의 노동운동를 지향하는 기본으로 해 기존의 사회주의 노동운동 방식과는 완전 다른 조직 방식이었다.

사회적 이슈화시키는데 유용한 가두 투쟁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를 포섭해 그들을 기반으로 하는 견고한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전환한다는 당재건 투쟁방식을 그대로 실천했다. 곧바로 경성 트로이카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은 국내 최대의 사회주의 운동 조직으로 발전했다.

특히 김삼룡은 하룻밤 사이에 트로이카 1개 이상을 조직할 정도로 탁월한 조직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조직의 달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러한 김삼룡의 조직활동으로 인해 인천은 적색노동조합의 근거지가 되었다.

김삼룡은 본격적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사업을 전개하면서 인천항 하역노동자의 생활에 대한 기본조사를 하고, 기본조사를 통해 조직사업의 방향을 정확하게 설정했다. 1933년 11월 중숨 김삼룡은 인천부 우각리 거주지에서 동거인 이상철과 이백만, 이석면 등과 함께 회합을 가져 인천적색운수조합을 조직하는 준비과정을 논의했다. 각자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를 포섭하고 또 기관지를 발행하고 이를 노동자에게 배부하기로 결정했다.

김삼룡은 회합에서 결정한 대로 인천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그대로 실천했다. 트로이카 조직이 되면 먼저 하역 노동자의 생활에 대한 자체 기본조사를 하도록 해 하역노동자의 노동착취 현실을 직시하고 타도 대상을 깊이 인식하도록 했다. 그리고 구체적 투쟁 목표를 설정해 실천하도록 했다. 또한 「공산주의 ABC」 등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회 활동을 하도록 했다.

특히 자체 발행하는 기관지를 통해 트로이카 조합원의 글을 게재해 인천항 하역노동자들으로부터 공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호응을 얻었다. 기관지에는 1) 노동자 착취기관 영신조, 창신조, 인신조를 타도하자 2) 우리는 기아와 실업을 유발하는 자본가와 그와 결탁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와 이에 관한 글을 통해 트로이카 아젠더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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