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1924년 초 예종구는 5년간의 인천 영화남자보통학교 교사생활과 내리 의법청년회 활동을 접고 화성군 송산면 마산2리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예종구는 농사에만 전념하지 않고 농촌 아동과 청년을 대상으로 한글, 한문, 산술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개설하고 직접 가르쳤다. 이 때 그의 나이가 28세였다.

▲ [예종구 사진] 출처: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 인천뉴스

1924년 10월 6일 예종구의 집으로 이창회와 이대정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찾아왔다. 이창회의 소개로 만난 이대정은 예종구에게 독립자금 50원 요구하였다. 이대정은 1924년 4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동휘장군이 신한공화국을 건설하려고 계획하고 소련연방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정부를 조직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김창길과 함께 이동휘장군으로부터 직접 여비와 「조선혁명선언」, 「신청년」 등의 문서를 받아 경기도 지방에서 독립자금을 모금하도록 명령받았다. 이들은 곧바로 함경도 부녕군으로 잠입했으나 노동절 사건으로 경계 강화하는 청진경찰서에서 불령선인 잠입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김창길을 체포하였다. 이대정은 급히 도주하는 바람에 체포되지 않았으나 일본경찰의 수배령을 피해 전국 각지를 전전하였다.

1924년 9월 15일 인천 거주 이창회과 연락이 닿아 인천으로 찾아왔다. 이대정은 이창회에게 방문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자금 모금에 적극 협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924년 9월 28일 이창회는 이대정과 함께 신한공화국의 의회와 정부의 명의로 된 선전문과 통첩문을 들고 영흥면 임윤배와 대부면 김완수 그리고 송산면 예종구를 소개시킨 것이다.

1924년 10월 6일 배를 타고 송산면 마산포에 내려 예종구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이대정은 신한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한 독립자금 50원 요구하였다. 예종구는 3~4일 말미를 주면 이창회에게 송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창회와 이대정이 일본경찰에 체포되면서 예종구도 수원경찰서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신한공화국 정부 수립 독립자금 사건 직후 송산면 마산2리 175번지를 떠나 송산면 사강리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사강리로 이사 온 예종호는 사강리 독립만세운동으로 무기징역을 살던 홍면옥이 가석방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자, 농촌 어린이와 청년에게 한글, 한자, 산술 등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심는 교육을 시작하였다. 예종구는 영화남자소학교 교사 경험이 있어 실제 강습소 운영을 도맡았다.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어린이와 청년들이 해방 후 송산면 치안대와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예종구는 사강교회에 출석하여 주일학교 교사 겸 총무로 신앙교육에 전념하였다. 홍면옥의 동생 홍준옥도 주일학교 교사로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사강교회 담임 목회지이자 독립지사인 유봉진전도사가 다른 지역 교회로 파송되고, 김봉진목사가 새로 파송받았다. 김봉진전도사는 유봉진전도사와는 달리 조선감리회 교단의 결정에 따라 예배당과 가정에 일본 천신의 봉임을 해야 했고, 가미다니를 설치하여 참배하도록 하였다. 강한 배일사상을 가진 예종구는 홍준옥과 함께 사강교회를 떠났다.

▲ [홍준옥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 인천뉴스

해방이 되자, 예종구는 홍면옥과 함께 그들을 따르는 청년들을 결집시켜 송산면 치안대를 결성하여 홍면옥이 치안대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일본 경찰과 일본인의 횡포를 차단하고 송산리 일대 치안유지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 송산지회로 전환시켜 행정과 치안을 관장하였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이후 미군정과 경찰이 좌익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강력조치를 취하면서 우익청년단체를 지원하는 체제를 구축하였다. 송산면에서도 사강교회 교인 손도심이 중국에서 돌아와 사강교회 청년 중심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송산지회가 결성하면서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었다. 수원경찰은 우익청년활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의용소방대를 만들어 가입 활동하도록 하였다. 인민위원회 송산지회를 위시한 좌익단체를 타격하였다.

“그러다가 손도심씨가 사강에 내려온 것을 계기로 사강에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그 창립대회를 우리 사강교회에서 열었습니다. 주도세력을 기승도, 최학렬 장로와 같은 우리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중략>이때부터 송산면에서도 좌우익 세력의 대립이 있게 되었는데 교회는 우익세력을 대표하게 되었습니다.”

홍면옥은 민전 경기지부 부위원장을 맡는 등 수원 박승극과 함께 경기도 좌익단체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예종구는 홍면옥과 함께 김구가 창당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김구의 통일노선조차도 빨갱이로 인식하는 우익단체로부터 빨갱이로 수원경찰서에 수차례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 [홍면옥 사진] 출처:국사편찬위원회 ⓒ 인천뉴스

1949년 6월 예종구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그것이 그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되면서 이승만대통령은 보도연맹원 예비검속령을 내려 예종구는 수원경찰서로 송치 구금되었다.

1950년 6월 30일 수원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예종구는 30여명의 예비검속자와 함께 수원 광교산에 집단학살 당하였다. 미방첩대 도널드 니콜스대령은 자서전 “그들은 어떻게 죽었는가?”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약 1,800명의 대학살이 수원에서 있었다. 나는 전 과장으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두 대의 불도저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한 대는 참호모양의 무덤을 팠다. 그때 재소자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도착하였다. 손이 모두 뒤로 묶여 있었다. 그들도 서둘러 판 무덤 언저리에 길게 줄지어 세워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머리에 총탄을 맞은 채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 [예종구 묘소] 출처: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보고서 ⓒ 인천뉴스

 

*인용 자료*

박환, 경기지역 3.1독립운동사, 선인. 2007.

박환, 조규태,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화성시, 수원대학교 박물관. 2003.

김진형, 사강교회 95년사, 사강교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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