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1923년 인배회 전인천축구대회 우승 기념사진 출처: 신태범의 인천 한세기

3. 김진호 목사의 부재와 조직 이탈

1922년 3월 인배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던 인천 내리교회 김진호 목사가 배재고보 아펜젤러교장의 종교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초대 교목으로 초빙되었다. 인배회는 김진호 목사의 후원 아래 내리예배당과 영화남자소학교에서 통상 모임 및 각종 집회를 가졌다. (이덕주, 김진호 목사의 교육과 목회, p.359)

김진호 목사의 부재는 인배회 활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후임 신홍식 목사는 전임 김진호 목사와는 달리 내리의법 청년회를 중심으로 하는 청년목회가 아닌 장년층을 중심으로 하는 통합목회로 전환하여 일본 경찰의 상시적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민족주의 사회운동을 전개하던 방향에서 충실한 신앙생활을 통한 개인 구원운동으로 전향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내리의법청년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하였던 동아일보 인천지국 관계자들이 이탈하였다.

친목과 교양을 표방하였지만 실제 민족주의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던 인배회 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대부분의 인배회 회원은 영화남자학교 졸업생이거나 내리의법청년회 회원이었다. 그래서 내리의법청년회 활동은 인배회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20년대 초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하게 확산되면서 청년운동의 방향이 사회변혁 운동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친목과 교양을 표방하는 본래의 목적에 부합한 활동을 하는 것을 전제로 후원하고자 하는 신홍식 목사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조직 재정비

1923년 9월 인배회는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독자적 활동을 모색하였다. 내리의법청년회와 무관한 독자적인 청년단체로 전환하고자 임원을 새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조직 정비를 계기로 회비 미납한 회원들을 독려하여 회비를 완납하도록 하였다. 또한 임원 선출을 통해 사업 혁신을 통해 인배회의 미래발전 계획을 새로 마련하였다. 1923년 9월 22일 인배회 회장 이택운의 사회로 정기총회를 열어 신임회장으로 이길용(본과 8회, 1916년 졸업)을 선출하여 졸업생들을 통괄 지휘하는 전권을 부여 받았고, 실제 회무를 주관하는 총무는 재학생 엄영섭(고보 10회, 1926년 졸업)이 맡아 회원 관리 및 회비 완납을 통한 인배회의 사업 혁신을 추진하였다.(동아일보 1923.9.30.)

1923년 12월 24일 인배회는 내리의법청년회의 남녀통합 문제 등으로 내부 진통을 겪으면서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모임을 자주 갖고, 임원간의 간담회를 자주 갖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인배회 음악부장 윤대석(고보 6회, 1922년 졸업)이 내리의법 통합청년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문예부장 홍호 등이 핵심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인배회는 내리예배당에서 동아일보 인천지국 후원으로 제 1회 인천웅변대회 개최 결정으로 인배회의 존재성성을 부각하고 인천 지역 청년운동의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였다.

1924년 3월 24일 영화학교 강당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규칙 수정은 간사회에 일임하고 회비는 매 학기 분납으로 1학기 당 40전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임원을 새로 선출하였는데 간사장 이길용, 간사 한상봉, 정태희, 엄영섭, 정만기, 갈홍기, 김기준, 강재하를 선출하였다. 그동안 인배회 임원 중 내리의법청년회 임원을 겸임하는 경우가 있었다. 1923년 11월 내리의법청년회 규정을 개정되면서 회원 가입 연령이 10세 이상에서 30세 이하로 제한하였다.그러면서 인배회 임원으로 활동했던 홍호, 윤대석, 김택영, 이보운 등이 내리의법청년회 임원으로 선출되면서 인배회 임원에서 배제되었다(동아일보 1924.4.9.).

1924년 4월 27일 인배회 통상회에서 신입회원 20명에 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인배회 조직이 크게 성장하였고, 활동영역이 확장되는 기반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동아일보 1924. 4.18.)

1927년 5월 14일 인배회는 내리예배당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신임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 윤대석 총무 임정섭 문예부장 이명국 사회부장 홍호 운동부장 조준상 회계 김형로, 김무근, 이양옥 서기 최홍렬이었다. 특이한 점은 회계가 3명으로 증원한 것이다. 이는 회원 관리를 세분하여 졸업생과 재학생 회비를 각각 분담하여 징수 및 관리하도록 하여 재정 구조를 안정화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중외일보 1927년 5월 23일)

1934년 3월 인배회는 정기총회를 통해서 회장 심형로 총무 김대임 종교부장 원종철 문학부장 문경윤 연예부장 한형동 음악부장 이유선 운동부장 장금성 회계 서병림 서기 원종철을 선출하였다.(이덕주, 배재학당 통사 ‘인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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