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배재고보 동교사(1914년 신축) 출처: 배재 80년사

 인천배재학우회(이후 인배회)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생들이 선호하는 명실상부한 기독교 민족학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배재고보 출신만이 갖는 동문의식은 언제든지 하나로 결속시키고 응축력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인배회는 1921년 11월 22일 대시민 계몽교양교육을 위한 제 1회 토론회를 내리예배당에서 열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제를 민감한 정치나 경제문제보다는 생활문화 문제로 정하였다. 첫 토론회 주제는 “가정을 화락케 하는 것은 남자이냐? 여자이냐?”였다. 토론자는 학교에서 토론회 참석 경험이 있는 재학생 중심으로 정하였다.

가편(可便) 토론자는 엄영섭(재학생, 고보 10회, 1926년 졸업), 김택영(재학생, 고보 6회, 1922년 졸업) 부편(否便) 토론자는 이보운(재학생, 고보 9회, 1925년 졸업), 진태원(재학생, 본과 13회, 1922년 졸업)로 정하였다.(동아일보 1921,11,22.)

인천부에서는 처음 열리는 공개토론회로 많은 부민들이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참석하였다. 토론회에서는 가정의 화락이 가장인 남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내에서의 여성역할을 인정해 줌으로써 진정한 가정 내의 화락이 온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가정 내에서의 여성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1922년 1월 23일 제 2회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청년담론’을 인천지역 사회에 던지는 주제 “사회를 정돈할 때에는 노년이냐? 청년이냐?”로 가편 토론자로 윤대석(재학생, 고보 6회 1922년 졸업), 김희영(재학생, 고보 9회 1925년 졸업) 김윤우(재학생 추정) 부편 토론자로 김기준(재학생 추정), 하인용(재학생 추정), 갈홍기(재학생, 고보 9회 1925년 졸업)

열띤 토론을 통해 식민지 현실 속에서 조선 청년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이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과 울분을 토로하고 진로에 대한 모색하는 자리였다.(동아일보 1922.1. 24.)

▲ 배재고보 서관(1922년 신축) 출처: 배재 80년사

인배회 토론회 주제는 다른 청년회와는 달리 현대 사조, 여성 문제, 청년 문제, 조선의 현실 등 다양하고 시의적절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나 노동문제와 자본주의, 마르크스 주의 등 민감한 주제는 가급적 다루지 않는 한계도 보였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인배회 회원 간의 갈등은 불가피하였다.

토론회가 일본경찰의 감시와 방해로 인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는 가운데 대안을 찾고자 하는 욕구를 다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과 문화에 목말라 하는 청년과 일반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하는 자리가 되었던 관계로 청중은 500-1,000명 정도가 참석하는 등 성황이었다.(박철하, 청년운동,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2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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