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인천골목문화지킴이 대표)

▲ 여공1인당 40대 가동 동양방적 인천공장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동양방적 인천공장 조선인 여성직공 노동자들은 2교대 12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일당 20전을 받았다. 한 끼 식사만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저임금으로 인해 도중에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공장 측은 당시 인천지역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현재 1000여명의 남녀직공을 수용하고 대대적으로 조업 중이라는 데 그 여직공의 임금에 있어 매일 12시간의 노동으로 겨우 20전을 점심값이라고 지급한다는 바 취직하였든 소녀들 중에 중간에 그만 둔 소녀도 많다고 하여 지식인들 중에서는 비난성이 자자하다고 하였다.’(동아일보 1934.7.15.)

기숙사 생활은 주로 황해도 일대 보통학교 졸업한 여성 직공 노동자들이 많이 했다. 이들 대부분은 가뭄, 수해로 기근이 심해지면서 부모 밑에서 농사일을 하는 것보다 도시에 나가서 취업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동양방적 인천공장에 취업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나이가 든 여성직공 노동자 중에는 시부모 밑에서 시집살이하는 것보다 차라리 공장에 나와 일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취직한 경우이다.

인천 거주 여성 직공 노동자 중에는 가정에서 벗어나 나름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자 일부러 공장에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부모가 행방불명된 딸을 찾아다니다가 동양방적 인천공장 기숙사 내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숙사에서 겨우 면회를 하고 귀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딸은 부모의 귀가 요청을 거절하고 기숙사 내로 잠적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에 부모는 공장 측이 딸을 일부러 빼돌린 것으로 의심해 인천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천부 송현리 83번지 박상직이라는 사람은 약 1개월 전에 딸 원석(17)이가 행방불명이 되어 백방으로 찾던 중 인천부 만석정에 있는 동양방적 인천공장 기숙사 내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기숙사에서 겨우 면회를 하고 여러 가지를 타일러 귀가하려는 즈음에 여공 셋이 쫓아나와 수군수군하더니 당장 귀가하려든 전긔 원석은 돌연 귀가에 응치 않고 내일 가겠다고 하던 것이 다시 종적이 묘연하게 되었으므로 이것이 공장측의 소행인지 또는 다른 사람이 잠재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므로 전긔 박상직은 인천서에 수색원을 제출하였다 한다.’(동아일보 193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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