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그 먼 길을 보고 다른 길을 걸어보다.

그 자신 노동자였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고 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섬(덕적도) 출신의 시인인 저자가 ‘이주, 그 먼 길’이라는 책을 쓴 것은 어쩌면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섬이나 촌락 출신이 도시에서 받는 대우는 불과 이삼십 여 년만 해도 이주노동자들이 대한민국에서 경험한 저자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인용은 그의 책에서 발췌한 이주노동자와 자신에 대한 공통된 답이다.

“이주노동자들을 공항에서 보는 순간, 시간의 흐름이 멈췄다. 그네들 앞에 새로운 세계는 무엇인가? 갑자기 허탈하고 답답해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 아열대의 빗줄기처럼 내 가슴을 두드렸다.”

자신이 처음 섬에서 나와 육지를 밟았을 때의 심정과 비슷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한반도에 외국인들이 왔던 기록은 도처에 있다. 신라 때 이미 아랍과 교류했고, 고려조와 조선시대에도 다수의 교류 흔적이 있으며 한족이나 만주족의 귀화는 흔했던 일이다.

조선 인조 때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는 박연이라 개명하고 훈련도감에서 일하면서 조선 여성과 결혼까지 하고 살았다. 그의 후손도 있었을 것이니, 당연 혼혈문제 또한 그 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다.

중국인들의 세계 진출은 오래된 일이다. 그들을 우리는 화교라고 부르며 우리와 달리 중국인 특유의 실용주의는 현지와 쉽게 조우하여,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지식과 상인의 대명사인 유대인들을 능가한다.

우리의 경우는 1905년 일인이 만든 조선 찬탈 기업인 동양척식회사에 속아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에 팔려 간 1천 33명의 노동자(일명 애니깽)가 그 원조로, 그들은 멕시코 현지의 원주민보다 못한 대우로 동물처럼 취급당하며 죽어 갔다.

나는 몇 년 전 요절한 선배작가(소설 ‘애니깽’을 쓴 김선영)에게서 그들의 피눈물 나는 얘기를 통음하며 들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작가는 참으로 많은 이주민들을 만났거나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찾아다닌 것 같다. 가장 성공(?)했다는 대한민국 이주민 1호 국회의원 이 자스민과의 만남부터 조안, 아르빈, 에리카, 사윙, 매네트, 리욤 등. 저자는 이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이중인격 장애의 나라에서 겪고 고통 받고, 상흔을 입고 살아가는 삶에서 새로운 인식을 끌어내려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술은 오늘 그 태도를 달리 한다. ‘이주민 노동자나 다문화가 겪는 우리 사회에서의 고충’ 어쩌구?의 담론에서 멀찍이 빗겨나겠다는 것이다.

아시아 45개국 중 우리나라의 이중적 태도에서 조금 비켜난 나라는 불과 몇 나라 안 될 것이다. 지금은 유럽이 되어 있는 러시아 동북방, 일본의 엘리트 부류, 오스트레일리아(?)를 위시한 오세아니아 국가 일부 정도.

지금 동남아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수많은 지참금(?)을 지불하는 모험과 한국에서의 모멸을 참아가면서까지 한국행을 택한다.

그들에게 한국은 기회와 약속의 땅이다. 동남아의 삶의 인프라는 그야말로 척박이다. 정글, 미개발국으로서의 지난한 삶, 물자의 태부족, 견딜 수 없는 더위와 어릴 때부터 일해도 하루 일이천 원도 안 되는 낮은 임금 등. 그러나 한국에 오면 다르다. 한국은 돈만 있으면 세계에서 최고로 살기 좋은 나라다.

밤늦게 돌아다녀도 안전하고, 밤새 먹을 곳, 마실 곳, 놀 곳이 있다. 게다가 살 곳이 이리 깨끗하고 안전한 나라가 동남아, 아니 미개발국이나 아프리카는 차치하고라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을 뒤져봐도 도대체 몇 나라가 있겠는가?

일본이라는 가까우면서도 결코 가까울 수 없는 나라? 일본은 비가와도 비질을 할 정도로 깨끗하기는 세계 최고의 나라지만 인성이 너무 잘아 경박스러운 민족이고, 천문학적 물가로 저임금에는 도저히 살기가 힘들다.

중국은 상하이나 베이징, 광저우 등을 제외하고는 동남아와 삶의 질이 매일반이거나 먹거리는 특히 못 견딜 정도로 불안하다. 한국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저렴하면서도 맛있고 배부른 먹거리는 도처에 널려 있고, 잘 곳이 없으면 저렴한 여관을 장기 임대하거나 깨끗한 사우나에서 자면 된다.

물론 돈도 현지인들인 한국인들의 평균 임금보다 훨씬 부족하게 받고, 공장이 망해 떼이는 일도 다분하고, 가끔 쥐어 박히기도 하지만, 안전한 직장만 확보하면 대부분 좋은 일들이 보장된 곳이다.

이세기라는 시인이 이 글을 쓴 이유는 우리나라의 이주민들의 힘든 삶과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동남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말하려 했겠지만, 나의 견해는 분명 다르다고 먼저 기술했다.

그 기술의 시초로 소설 ‘애니깽’을 먼저 얘기했듯이,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우리나라의 산업화 초기에 흘리던 해외로 팔려 간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눈물의 양도 엄청난 것이었다.

기억해보자. 독일로 팔려 간 대한민국의 광부들이 독일인들은 죽을까 무서워 들어가지 않던 깊은 곳까지 들어가 얼마나 많은 우리의 고귀한 산업역군들이 파묻혔는가? 그들 대부분은 당시 일자리가 없어 자원했던 고급인력으로 석박사도 많았다.

지금은 넘쳐나서 많이 배운 사람들의 일자리가 태부족이지만 당시는 정말 일할 곳이 없었다. 그만큼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다.

광부로 일한 석, 박사들보다 더한 아픔은 간호사라는 양질의 직업을 믿고 독일로 날아갔으나, 산 생명의 간호는커녕 독일 의료계가 꺼려하던 대부분 참혹한 시체를 닦는 일에 종사하던 간호사들의 피눈물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독일에 진출한 노동자들은 그렇게 살았고, 미국에서 박대 받고 돈 빌리러 독일로 날아 간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손을 잡았고, 서로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

이주민들을 대하는 나라는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나라나 대동소이 하다. 다만 당시의 독일은 우리 노동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가난한 나라에 차관을 주어 그 차관이 이 나라의 경제를 재생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을 뿐이지만, 비교하고 견주어보았을 때, 지금 우리 정부가 동남아에 베푸는 흔적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이주민노동자의 대부분인 중국교포와 동남아인들은 우리나라에서 고통 받는다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나라처럼 다민족 국가 복지, 이주민 복지, 다문화 가정을 외치고 국민의 내는 세금의 상당 부분을 그들에게 쏟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물론 다문화에게 돌아가기 전에 이 나라의 복지공무원이나 단체들의 유용은 상상을 불허하지만 그것은 이기주의에 물든 이 나라의 오래된 병폐이니 어쩌랴? 우리가 동양권, 그것도 옐로우 코리아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탈색인들의 나라에 가면 흑인들보다 취급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우리가 백인들이라고 굴신 대는 탈색인들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 태도가 수교 이래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고, 21C의 성숙한 사회에서도 꿋꿋하게 세계화를 외치는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한국 언론이 나는 우습다.

다시 말하면 광대무변한 우주의 티끌인 은하계 수억의 별들 중 하나인 모래 같은 지구에서 세계화를 왜 기어이 해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왜 기어이 유럽과 유대인들의 전유물인 노벨상을 타러 그렇게 무리수를 두는지, 왜 기어이 유엔이라는 국제조직 한 기구의 장이 되려 그리 몸부림을 치는지, 그리고 21C에도 세계의 성공 사례를 찾아 ‘글로벌코리아’를 외치는 한국방송공사가 나는 우습고 슬프다.

한국은 이미 세계적인 나라이고 OECD국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면서도 그렇게 한국의 공영TV는 여전히 세계화고, 글로벌 성공인을 비춘다. 연속극은 아직도 70년대식의 프로파간다로 도배되고, UN사무총장은 그저 직업의 한 종류일 뿐인데 반기문처럼 내 자식들도 다 UN사무총장을 꿈꾸라 한다.

단언하건데 우리나라에서 이제 UN사무총장은 몇 백 년 안에는 안 나온다. 요구하는 내용과 다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의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내 삶이 곧 전 지구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문화니, 이주민 노동자들의 고충이니 하는 형용사는 이제 지겹다. 우리나라 어느 공장지대를 가보라 그들로 인해 불편해 하면서도 편안한 대한민국의 삶에 기대어 안락한 씀씀이(물론 제한된 범위)이로 때 묻은 지폐를 세는 상점들 많다.

내 자신이 흔히 세인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롤러코스터를 타지 못한 사람이라서 반대급부로 얘기하는 비약은 절대 아니다.

사윙이 9만 바트라는 거금을 주고 한국에 왔을 때 그의 꿈은 한국에서 몇 년 일해 자국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편안히 사는 것이었을 것이고, 우즈벡에서 온 메네트가 실어증에 걸리고 정신착란에 이른 일도 다 자국에서는 살기 힘드니 한국이라는 약속과 기회의 가나안에 와서 열심히 벌어 돌아가 잘 살기 위한 것이었다.

손가락을 잃고 3,100만 원을 받고 방콕으로 돌아간 리욤은 그래도 그 돈으로 택시 두 대를 사서 영업하는 사장이다. 그러나 리욤이 한국에서 손가락을 잃은 일은 분명 슬픈 일이고 대한민국은 리욤과 같은 이주민 노동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대한민국은 충분히 반성하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겸허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자, 왜 한국인만 반성해야 하나? 우리는 반성해야 하면서 왜 우리는 많은 시간의 흐름동안 탈색인들이 우리에게 그동안 행한 행위와 일본인들의 그 천한 선민사상에 의한 도발행위, 차이나의 동북공정에는 제대로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가?

역설적으로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리욤은 태국으로 돌아가 택시를 두 대나 사서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이어서 3,100만 원을 받았다면 한국에서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한국인에게는 3,100만 원 이상을 줬을 것이라고? 중소기업은 세계 어디나 다 같다. 중소기업의 사장들 돈 없고 빽 없다.

그냥 대기업 들어가지 못해, 아는 것이 그것이어서, 또는 가업을 이어받거나,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서다. 나는 욕을 맞을지언정 강하게 반문하고 싶다.

값싼 동정은 이제 그만두자. 이 주제를 접했을 때 사실 나는 많이 망설였다. 지방신문의 칼럼니스트이자 편집위원으로 자유롭게 기고하는 내가 왜 점수 받을 수 있는 그럴싸한 칼럼을 쓰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 글을 쓰며 나는 나에게 자문해 보았다.

이주민들을 무조건 위하는 글을 써서 읽는 분들에게 점수를 잘 받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이주민 노동자들에 대한 그동안의 견해를 담담하게 적을 것인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왜 이 나라는 세상의 질서에 편승하려는 우리의 못난 어떤 시늉에 그리 민감하고 목말라 하는가?’를 반성하면서.

손가락이 잘리는 피해는 주로 프레스 공장에서 일어난다. 지금은 자동기계가 저절로 손을 감지하여 떨어지다가도 멈추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동프레스기를 놓는 공장은 별로 없었다.

나의 매형도 손 전체가 프레스에 잘려 나간 산재 노동자인데, 제대로 보상조차 못 받았다. 불과 십 여 년 전의 얘기다. 이주 노동은 어렵고 이주민의 삶은 버겁다.

그러나 그 체감은 자국을 떠난 모든 이주민들의 공통점이다. 이 나라 민족성에 문제가 있어 동남아의 이주민들이 많이 힘들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주해 간 노동자들의 과거도 아니 현재의 그것도 비슷하다.

지구는 어쩌면 우주에서 유일한 푸른 별일지도 모르고, 인간은 우주에서 유일한 생각할 줄 아는 고등동물일지도 모른다.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가 우주에 몇 억 개인지 모르지만, 빅뱅으로 탄생한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도 약 37억 년 후면 소멸되어 블랙홀을 택한다.

 원작자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새로운 삶을 위해, 행복을 위해, 내 가족을 위해 목마름의 꿈을 낳는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다 적용되는 말이다.

세게는 원래 평등하지 않은 법이다. 선사시대에도 역사시대에도 세계가 단 한 번이라도 평등했던 적은 없다. 민주주의의 꽃이었다는 고대 로마에도 노예가 있었고 여성의 참정권이 없었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든, 사회민주주의든 자본 제일주의라는 거대한 놀음으로 인해 더욱 양극화된 빈부의 차이를 극복할 방법을 전혀 제시할 수 없다. 자유토론을 즐겼던 소크라테스가 선동을 이유로 독배를 마신 것은 그의 평소 언행을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평등과 질서는 구호뿐이다. 세계 속의 한국을 외치는 우리의 입장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한국은 이미 세계적인 나라다. 한글은 세계에서 발명 날짜를 확실하게 간직한 최고의 발명품이고, 우리의 수백 개의 제품이 세계 제1이다. 그런 나라에 노동자로 달려오는 동남아나 세계인들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는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고 반성해야 할 핵심이지만 이주민과 다문화를 너무 외치는 대한민국의 태도도 옳지 않다.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이나 타국에서 억압 받는 자국민들의 현실은 외면하면서 다문화니, 이주민 노동자의 인권에 그리 목메는 것은 글로벌 대한민국을 보여주기 위한 기만이자, 국제 사회에 보이는 얕은 수의 꾀에 불과하다.

먼저 자국의 노동자, 농민, 소외계층, 독거노인부류, 청년실업, 중, 노년 실업으로 인한 가정의 파괴 같은 현실적인 문제부터 진단하고 해결한 다음 다문화, 이주민 노동자의 인권에 발맞추자. 그들에 대한 배려를 고려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우선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적확한 인식을 선행하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글로벌리제이션화한 나라를 찾아 자국민이 못하거나 꺼리는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리거나, 평생을 한국이라는 나라를 원망하며 돌아가는 이주민 노동자들의 인권은 중요하다. 더불어 이주민들의 노동 현실에 대한 변화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고, 세계가 이주민들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는 당연히 촉구해야 할 것이다.

러시아나 독일 등의 나라에서 동양인들에게 가하는 폭행이나 ‘옐로우, 우리 직업을 뺐지 마.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따위의 구호도 고쳐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확연하게 있듯이 어느 나라나 민족 우선주의는 있다.

악몽을 꿈꾸는 이주 노동자도 노동자다. 희망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편견일 수 있다. 희망을 잃어버리는 이들은 오히려 자국에서 사업을 실패한 중년들이거나 노년 들어 살기 힘들어진 자국의 국민들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다. 이제 대한민국의 이중인격도 수술대의 강한 메스를 경험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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