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소래로 바람을 쐬러 갔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지르고 갈매기들이 “끼륵 끼륵”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소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멀리 가지 않고도 작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포구의 향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래포구의 역사는 1930년 일제가 소래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을 수탈해 가기 위해 수인선을 건설할 때 인부들과 염부꾼을 실어나르기 위한 나룻배 한척을 포구에 정박하면서 시작된다. 소래부터 서창동까지 드넓게 펼쳐져 있었던 염전은 지금 생태습지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1937년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마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실향민 6가구 17명의 어부들이 새우잡이를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소래가 포구로서 유명해진 것은 1974년 인천 내항이 준공되면서부터다. 새우잡이 소형 어선들의 내항 출입이 금지되면서 소형 어선들이 소래로 몰려들어 소래가 새우파시로 부상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새우나 꽃게를 가득 싣고 돌아오는 어선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화가 소래 갯벌을 매립하면서 소래포구의 전성기는 기울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고 포구 위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관통해 지나가면서 소래는 포구로서의 모습을 많이 잃은 것이 너무 안타깝다.    

우리는 바다와 고깃배를 볼 양으로 수협 공판장을 지나 해안 둑으로 나갔다. 그러나 우리를 맞이한 것은 바다를 가로막고 투박하게 설치된 불투명하고 높은 철제 난간이었다. 사고예방을 위해 설치한 난간이라면 투명하게 만들어 바다를 보이게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둑을 따라 즐비했던 노점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상점에 진열된 고기들을 구경하면서 걷기 좋은 길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길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흉측하게 생긴 커다란 시멘트 화분들이었다. 그 길에 굳이 화분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데 아마도 노점상들이 다시 자리잡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 많던 노점상들은 어디로 갔을까? 둑길 끝에는 난간도 모자라서 조그만 건물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화장실과 파출소였다. 아연실색! 화장실과 파출소가 있을 자리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횟집들을 빠져나와 옛 수인선 철교로 갔다. 예전에는 국내 유일의 협궤열차가 다니던 수인선의 소래와 월곶을 잇는 철교였지만 너무 노후하여 지금은 사람만 건너다닐 수 있게 보존하고 있었다. 철교까지는 장도포대지 옆으로 난 좁은 통로를 10여 미터 걸어가야 했다. 길 양쪽으로 내 키를 넘는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상당 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 파손된 틈마다 쓰레기가 널려 있었고 지저분한 횟집 지붕들이 보였다. 장도 포대 쪽 녹지대에서는 만취한 중년 남자가 회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사고예방을 위해 설치한 철교 난간도 더러워서 바다가 잘 보이지 않았다. 둑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갇힌 듯한 기분이 들어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큰 길로 나와 옛 길을 찾아 보았다. 시내에서 소래로 들어가던 유일한 도로였던 옛길은 장도로라 이름붙여져 있었는데 이제 다섯 블록에 걸쳐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옛길을 따라 한편으로는 옛집들이 그대로 있었고 반대편은 논현광장이라 하여 넓은 공간을 확보해 놓았다. 우리는 소래의 옛 모습을 그리며 그 길을 걸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둑방 횟집거리와는 달리 이곳은 광장인데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광장은 어부들이 널어놓은 그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광장은 왜 만들었을까? 광장이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인데 사람들의 이동통로를 고려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만든 광장에는 사람이 없을 수 밖에 없다.     

소래에 가서 회만 먹고 올 때는 몰랐는데 소래의 민낯을 돌아보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분명 도시계획을 세워 개발했을텐데 입안자들은 어떤 도시를 만들려고 했을까? 소래에도 역사가 있고 문화적 자원이 많은데 그런 것을 충분히 고려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도시에도 영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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