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흔적

산비탈에 버려진 쪽바가지 한 개

파란 잔디가 덮어 지붕을 만들었다
산 속까지 끌고 온

끈질긴 인연
떠나기 아쉬워

인적 드문, 여기까지 흘러왔나
산새와 초연한 바람이 찾아준다
차라리 병든 몸, 가벼운 한 점의 가루 되어

저 바가지에 얹혀
사라지는 바람이고 싶다
-이복래 시집 <에필로그 독백> 중에서

이복래

경남 양산 출생. 한맥문학으로 등단. 내항문학 동인.

평생 사람들 속 온갖 감정의 틈바구니에 끼여 살다보면, 왜 살아야 하는지도 잊을 수 있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잊을 수 있다. 알려고 한다 해서 알 수 없는 것이 생명의 비밀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돌아볼 기회조차 없도록 바쁘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자주 보곤 한다. 인간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 그 용도를 다하거나 폐기되어 버려져 있는 모습들을. 토담 밑에 버려진 깨어진 사기그릇들이나, 길거리에 뒹구는 신발짝들이나, 산비탈에 엎어져 있는 쪽바가지나. 모두가 마찬가지로 그 모습들이 처연하다. 수명이 다하여 버려진 것들의 모습은 이토록 짠하다.

인적 없는 곳에 버려져 초연한 바람만이 벗이 되어준다. 인간은 살아도 자연의 하나이고, 인간 세계를 떠나도 자연의 하나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미가 있는 깨달음인지도 모르겠다. 평생 열심히 살아온 노시인이 버려진 쪽바가지를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을 께닫고 있다./장종권(시인, 문화예술소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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