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의미

 

▲ 인천보훈지청 보상과 이유라

1919년 3월 1일,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짖었다. 그것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국권피탈과 군사와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에 맞선, 독립에 대한 열망을 토해낸 힘없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이었다.

 비록 그때 바로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하였지만 3·1 운동은 결코 실패로 기록되는 사건이 아니다. 3·1 운동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은 독립에 대한 굳은 의지로 모두의 힘을 모은다면 독립을 이룰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투쟁을 이끌 보다 체계적인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그것이 3·1 운동이 남긴 커다란 성과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의 발판이 되어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임시정부가 처음부터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국내외에 다양한 형태로 조직되어 있던 임시정부들을 하나의 임시정부로 통합하기 위한 운동을 거쳐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이어받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여, 1919년 4월 13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한 물질적․정신적 교두보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우리 민족에게 임시정부의 노력을 알리고 독립의 필요성에 대해 일깨워주었으며, 연통제 등 비밀 연락망을 통해 독립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제의 억압은 국내에 머물지 않고 중국에까지 닿게 되자, 중국 내륙을 떠도는 시련까지 맞게 되었지만 포기란 없었다. 

임시정부의 군대 한국광복군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국내수복작전을 준비하는 등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국내수복작전은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주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는 그 의미까지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주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담아 탄생하였다. 또한 근대적인 헌법 체제를 갖춘 민주공화제 형태로 출발하였기에 대한민국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1989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고 1990년부터는 매년 정부주관 기념식을 거행해 오고 있다.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의의와 순국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보고, 일제의 암흑기 속에서 빛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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